항목 ID | GC08700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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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仁德 |
영어공식명칭 | Go Inde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형열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11월 3일 - 고인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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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1월 - 고인덕 중국 만주로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1월 - 고인덕 의열단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2월 10일 - 고인덕 기독교청년회 주최 강연회에서 강연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3월 22일 - 고인덕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 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11월 - 고인덕 ‘경북의열단폭탄의거’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12월 18일 - 고인덕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26년 12월 21일 - 고인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고인덕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20년 12월 27일 - 고인덕 의열단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에 참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0년 11월 17일 - 고인덕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묘소 이장 |
출생지 | 내이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
학교|수학지 | 대구 사립 계성중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로 35[대신동 277-1] |
활동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고인덕(高仁德)[1887~1926]은 1887년 11월 3일 고삼종(高三鍾) 목사의 둘째 아들로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고인덕은 1908년 대구 사립 계성중학(啓星中學)에 입학하여 중등교육을 이수하였다. 1918년 11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하여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11월 지린[吉林]에서 조직된 의열단에 가입했다.
고인덕은 1920년 의열단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에 참여하였다. 의거의 추진 과정에서 폭탄을 제작하여 최수봉(崔壽鳳)에게 전해주었고, 이에 따라 상해에서 구입한 폭약과 폭탄 제조기를 가지고 입국하여 계획대로 밀양에서 최경학에게 직접 전달하였다. 최경학은 폭탄 두 개를 만들어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거행하였다. 의거 직후인 1921년 2월 10일에는 부북면의 백희원(白熺元)과 함께 밀양읍 기독교회에서 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하여 ‘안락의 본(本)은 고초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조선 독립을 역설하는 강연을 하였다. 그러나 강연으로 1921년 3월 22일 일제 경찰에 체포된 뒤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1년 6개월을 복역하던 중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고인덕은 의열 투쟁에 열성적으로 가담하였다. 의열 투쟁을 실행하기 위하여 상하이에 특파원을 파견하여야 한다는 동지의 말을 듣고, 가산을 처분하여 3,000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지원하기도 하였다. 1925년 11월에는 세칭 경북의열단폭탄의거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종암(李鍾巖)이 1925년 7월 입국하여 국내 단원들과 거사를 협의하고 있던 중 거사 계획이 일제에 발각되어 대검거가 일어난 것이다. 이로 인하여 1925년 12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결국 1926년 12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묘소]
고인덕의 묘소는 1970년 11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고인덕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