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42
한자 金弘圭
영어공식명칭 Kim Hong-gy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경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 12월 15일연표보기 - 김홍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 김홍규 3·13 만세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 김홍규 간도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25년 3월 - 김홍규 신민부에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27년 4월 - 김홍규 국내에서 독립운동 모금 운동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1월 - 김홍규 일제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8년 8월 22일 - 김홍규 경성지법 검사국의 검찰 심문
활동 시기/일시 1929년 6월 26일 - 김홍규 경성지법 제1차 공판
활동 시기/일시 1929년 7월 25일 - 김홍규 경성지법 제2차 공판
활동 시기/일시 1929년 9월 16일 - 김홍규 경성지법 제3차 공판
활동 시기/일시 1929년 9월 25일 - 김홍규 경성지법 제4차 공판으로 2년 실형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김홍규 출감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김홍규 북간도 동경성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
몰년 시기/일시 1951년 10월 15일연표보기 - 김홍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6년연표보기 - 김홍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사연리 -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 1078 지도보기
활동지 영안현 - 헤이룽장성 닝안현
활동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홍규(金弘圭)[1889~1951]는 1889년 12월 15일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 1078에서 아버지 김만두(金萬斗)와 어머니 최대년(崔大年)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홍규는 1919년 4월 4일 단장면 용회동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헌병과 경찰이 시위대의 해산을 강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산발적으로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홍규를 비롯한 364명이 검거되었다.

만세 시위 이후 신분상의 불안감과 장래를 걱정하던 김홍규는 1919년 5월 간도로 망명하였다. 북간도 무송 지역에서 윤세복을 만나 대종교를 신봉하게 되었고 민족의식 교육과 한글을 학습하며 대한국민단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3년부터 고향을 오가며 임무를 수행하던 김홍규는 1925년 3월 대종교 교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 북만주 영안현(寧安縣)에서 결성된 신민부에 가담하였다.

1927년 윤창선, 손봉현, 손호 등과 함께 일찍이 대종교에 입교하여 위장 종교단체인 ‘해원교’의 기금을 마련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1927년 4월 김좌진 장군의 밀명을 받고 신민부 단원으로서 국내에서 독립군 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11월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에 살던 부호 김태진으로부터 군자금 3,000원을 받아내고 김태진의 아들 김용출을 포섭하여 북간도로 데려가 대종교인으로 만들려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8년 8월 19일 종로경찰서의 1차 심문, 1928년 8월 20일 2차 심문, 1928년 8월 22일 경성지법 검사국의 검찰 심문, 1929년 3월 8일 경성지법 1차 심문, 1929년 5월 13일 경성지법 2차 심문, 1929년 6월 26일 경성지법 제1차 공판, 1929년 7월 25일 경성지법 제2차 공판, 1929년 9월 16일 경성지법 제3차 공판, 1929년 9월 25일 경성지법 제4차 공판을 통하여 적용 법조문 「형법」 제226조, 「형법」 제162조, 「형법」 제163조, 「형법」 제159조, 「형법」 제161조, 「형법」 제167조, 「형법」 제246조, 「형법」 제240조, 「형법」 제236조, 「형법」 제63조, 「대정 8년 제령 제7호」[제1조] 위반죄로 2년의 실형이 선고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31년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였으나 옥중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인 사연리에서 오랜 기간 요양을 하였다.

1935년 북간도 동경성에 있는 윤세복의 근거지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이주 한인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에 전념하였고, 1940년 봄 둘째 아들 김현출(金鉉出) 내외와 손자들을 북간도로 이주시켜 안정적인 활동 장소를 마련하고자 했다.

해방 이후 스스로를 몽양 여운형의 비서 일원이라 자처하며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947년 7월 19일 몽양의 저격으로 실의에 빠져 방황하였고, 고문 후유증까지 겹쳐 오랜 신고(身故) 끝에 1951년 10월 15일 고향집에서 운명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홍규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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