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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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星淑 |
이칭/별칭 | 김성암(金星巖),운암(雲巖)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 김성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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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김성숙 출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9일 - 김성숙 '조선독립단 임시 사무소' 명의 격문 제작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9일 오후 9시~1919년 3월 30일 오전 5시 - 김성숙 격문 배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9일 - 김성숙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10일 -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11일 - 김성숙 형 확정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4월 28일 - 김성숙 출소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김성숙 무산자동맹 노동공제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김성숙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김성숙 중국 광둥 중산대학에서 정치학 공부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12월 - 김성숙 중국 공산당의 무장봉기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김성숙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김성숙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직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 김성숙 조선의용대 조직 참여, 지도 위원 겸 정치부장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김성숙 임시 정부 내무차장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2월 - 김성숙 임시 정부 외무부 외교 연구 위원회 위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12월 - 김성숙 환국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12월 - 김성숙 민족 자주 연맹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김성숙 민족 자주 연맹 대표로 남북 협상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55년 - 김성숙 진보당 추진 준비 위원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김성숙 사회대중당 창당 참여, 총무 위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61년 - 김성숙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66년 - 김성숙 신민당 창당 참여, 지도 위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969년 4월 12일 - 김성숙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김성숙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김성숙 묘소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에서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로 이장 |
출생지 | 김성숙 출생지 - 북한 평안북도 염주군 삼개리 |
학교|수학지 | 대한독립학교 - 평안북도 철산군 |
학교|수학지 | 중산대학 -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 신강시루 |
활동지 | 봉선사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
묘소 | 김성숙 묘소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
성격 | 독립운동가|승려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
[정의]
경기도 남양주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김성숙(金星淑)[1898~1969]의 본관은 상산(商山)이며, 어릴 때 이름은 김성암(金星巖)이고, 호는 운암(雲巖)이며,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아버지 김문환(金文煥), 어머니 임천 조씨(林川 趙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으로는 두군혜(杜君慧)와 김명선(金明善)이 있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현 북한 평안북도 염주군 삼개리]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용문사(龍門寺)에서 출가하여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25세 때 승려 신분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에 유학한 뒤 중국 각지에서 여러 단체를 이끌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이승만 정권과 5·16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김성숙은 10살 때 평안북도 철산군의 유지들이 세운 대한독립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16년 19세의 나이로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에서 풍곡신원(楓谷信元) 선사를 만났고, 그 길로 풍곡신원 선사를 따라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하였으며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월초거연(月初巨淵)으로부터 ‘성숙(星淑)’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9년 전국에서 3·1운동이 전개될 당시 김성숙은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봉선사에 있었다. 이때 김성숙은 봉선사의 승려였던 이순재(李淳載), 강완주(姜完珠) 및 서울에서 약종상을 하고 있던 김석로(金錫魯)와 함께 부평리 인근의 주민들을 모아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김성숙 등은 만세 운동을 진행하기 위해 1919년 3월 29일 봉선사 서기실에서 ‘조선독립단 임시 사무소’라는 명의로 격문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고,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운동하면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김성숙은 이순재, 김석로와 함께 편집한 해당 격문을 등사판으로 약 200매를 인쇄하였다. 그 후 김성숙은 이순재, 강완주 등과 함께 1919년 3월 29일 오후 9시부터 1919년 3월 30일 오전 5시까지 진접면 부평리·진벌리·중촌리 등의 민가에 격문을 배부하였다. 1919년 3월 31일 진접면 부평리의 광릉천 일대에서 만세 운동이 전개된 것은 김성숙 등이 주도한 해당 활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성숙은 격문을 배포한 혐의로 다른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김성숙은 불복하여 공소하였고, 1919년 7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1919년 9월 11일 형이 확정되자 김성숙은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한 뒤 1920년 4월 28일 출소하였다. 그리고 1920년 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에 참석하였고, 노동공제회에서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일어난 소작 쟁의의 진상을 서울의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支會)에 알렸다.
1923년 25세의 나이에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으며 일제의 중요 기관을 파괴 대상으로 삼은 조선의열단에서 선전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1925년 말 당시 중국 혁명의 근거지인 광둥[廣東]으로 이동하여 중산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1927년 12월에 중국 공산당이 광저우에서 일으킨 무장봉기에 참여하였다. 무장봉기가 실패하자, 상하이로 가서 중국문화총동맹과 중국좌익작가연맹 등에 관여하였다. 1936년에는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였다. 1938년이 되자 한커우[漢口]로 이동하여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 위원 겸 정치부장이 되었다. 김성숙은 1942년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편입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42년 임시정부 내무차장을 시작으로 1943년 2월에는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 위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 및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선전부의 선전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광복을 맞아 1945년 12월 환국한 이후에는 임시정부와 좌익 진영 간의 연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후 좌파에 합류하였고, 좌우 합작 위원회 좌파 대표와 근로인민당 조직 국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12월에는 민족 자주 연맹 결성에 참가하였고, 1948년 남북 협상 당시 민족 자주 연맹 대표로 참여하였다. 김성숙은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서울에 남았으며, 이로 인해 부역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55년에는 진보당 추진 준비 위원회에 관계하였으며, 진보당 사건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사회대중당을 창당하고 총무 위원이 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1966년 재야 통합 야당인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지도 위원이 된 후 야당 활동을 하다가 1969년 4월 12일 병사하였다.
[묘소]
김성숙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에 있다가, 2004년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