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721 |
---|---|
한자 | 禹輔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강산 |
출생 시기/일시 | 1862년 10월 21일 - 우보현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4일 - 우보현 만세 시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4일 - 우보현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8일 - 우보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 선고 |
추모 시기/일시 | 2006년 - 우보현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우보현 출생지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우보현(禹輔鉉)[1862~?]은 1862년 10월 21일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해당하는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에서 태어났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사항]
우보현은 1919년 3·1운동이 조선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에 동조하여 조선 독립의 열망을 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13일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 구장이었던 이승익이 동리 사람을 소집하였고, 정기섭·김영하를 비롯하여 마을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박 아무개의 주막에 모여 회합하였다. 회합에서는 당시 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배포한 ‘고유문’을 나누어 읽었다. ‘고유문’은 “국민들은 쓸데없는 유언비어에 열중하여 되지도 않는 일에 광분하지 말라. 제국은 전승국이므로 일한합병에 관하여는 조금도 변경의 여지가 없다”라는 것으로, 3·1운동이 무의미함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후 주민들은 야유를 퍼부으며 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 14일에도 이승익·이보영·김영하·이석준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고,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미금면사무소가 있었던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남양주시 금곡동]로 이동하는 와중에 일본인 경찰과 마주쳤는데, “2000만 동포가 조선 독립을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는 것이 정당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며 저항하였다. 저항 과정에서 우보현은 주모자로 인정된 이승익, 이보영, 정기섭, 김영하, 이석준과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나이는 58세로 체포된 6인 가운데 최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세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19년 6월 28일과 1919년 8월 18일 두 번에 걸쳐 상고하였지만 기각 판결을 받고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우보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