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묘골
-
시묘리라는 지명은 시묘살이를 한 효자가 살았던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시묘살이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룬 다음 그 묘 앞에 움막을 짓고 묘를 지키는 행위를 이르는 것이다. 말이 쉽지 시묘살이는 아무리 대단한 효자라 해도 직접 실행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다. ‘충’과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조선시대에도 시묘살이를 한 효자에게는 국가가 직접 포상을 내...
-
시묘리의 네 마을은 농경지가 적당하게 있어 밭을 갈아먹던 산골마을은 아니었지만 부촌도 아니었다. 지주라고 해봤자 백석지기인 방씨네가 있었을 뿐, 대부분 그럭저럭 좁은 땅에 농사를 지으며 힘겹게 살았다. 매년 어김없이 보릿고개가 닥쳤고 그때마다 마을 동계나 동네 지주로부터 장례쌀을 빌려 겨우 연명해야만 했다. 당시 마을재산은 정월에 풍장을 치며 집집마다 걸립을 하고 쌀이나...
-
시묘리는 시묘천을 따라 이어지는 지방도 602호선의 양쪽에 골짜기마다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물길 방향인 남동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보면 시묘2리, 시묘1리, 시묘3리, 시묘4리의 순서로 이어진다. 시묘리는 4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구자곡면 시절에는 하나의 마을이었다가 구자곡면이 1936년 연무읍으로 승격되면서 시묘리는 은진면으로 편입되었고, 이때 인...
-
시묘골의 노인회장 최재현 씨는 시묘리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할 만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31년에 출생하여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6·25 한국전쟁을 겪었다. 논산농고 제1회 졸업생이며 국가재건에 힘쓰던 시기에 논산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상경하여 개인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에너지 파동으로 사업체는 부도가 나고 결국 고향으로...
-
시묘4리의 버들골 골짜기 안쪽의 좁고 깊숙한 곳은 일명 ‘일천다랭이골’이다. 다랭이 논이 어찌나 길게 이어지는지 천 개나 된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하늘에서 비 내리기만 기다리는 천수답이었으므로 깊고 경사진 골짜기에 수십 개의 층계를 만들어 벼를 심고 흘러내리는 물을 활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오죽하면 ‘천개’라고 했을까. 그 이름만으로도 험한 산골을 일구며 살았던 옛...
-
시묘리 네 개 마을에는 모두 각각의 동네계가 따로 결성되어 있다. 이중에 부수골의 동네계에서는 계장을 이장과는 별도로 새로 뽑는데, 임기가 3년이다. 이장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동계장은 주민들의 애경사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동계 모임이 있는 날이면 마을을 떠나 서울에 사는 사람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서 참석한다. 특히 동네...
-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동산리와 은진면 시묘리에서 발원하여 채운면 화산리에서 논산천에 합류하는 하천. 방축천은 연무읍 동산리 담배산(87.6m)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는 한 지류와 은진면 시묘리에서 발원하여 북서류하는 또 하나의 지류 등 두 줄기의 상류가 연무읍 북동부일대에 곡저 충적지를 형성한 뒤, 은진면 새터 근처에서 합류가 되어 연속해서 은진면 남부 및 채운면 동부일대의 침식평탄...
-
시묘리라는 지명은 효자가 부모의 묘 앞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시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묘를 지킨다는 뜻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효심이 깊은 자식은 부모님의 묘를 지키게 되는데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생업을 포기하고 묘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것도 힘든 일일 뿐더러 시묘살이는 개인의 모든...
-
부수골 은 시묘3리의 가운데에 위치한 마을이다. 4개의 행정리에 속한 여러 자연마을 중에 가장 안온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신사산의 산줄기가 마을의 양쪽을 감싸 안은 것 같은 형국이다. 도로변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가면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부수골을 둘러싼 낮은 야산은 정식 행정지명이...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속하는 법정리. 옛날 지씨(池氏) 집안의 한 효자가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하여 시묘골이라 하였다. 은진군 죽본면(竹本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에 부수리(富壽里)·용계리(龍溪里) 각 일부와 가야곡면 두월리(斗月里) 일부, 대조곡면(大鳥谷面) 용와리(龍臥里)·백양리(栢楊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시묘리라 하고 논산군 구자곡면(九子谷面)에...
-
옛날 시묘골과 황골 등지에서는 ‘고려장’ 또는 ‘고린장’이라 부르는 옛 사람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산속에 나무가 우거져 찾아 볼 수도 없고, 어떤 모양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도 없지만, 마을 어른들이 아이들을 앉혀놓고 고려장 지낸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지어내 들려주곤 하였다. 언뜻 돌로 만든 무덤 같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의 무덤이...
-
최재현 씨가 사업에 실패하고서 돌아온 고향에서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였지만, 그때까지 직접 땅을 파 본 적이 없을 만큼 큰 고생을 모르고 살았던지라 바로 논밭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마침 들려오는 소문은 채운면 용화리에서 시작된 딸기농사가 수익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당장 채운면의 딸기밭을 찾아가 농사법을 살펴본 후 딸기 묘를 받아와 시묘골에 재배를 시작했다...
-
일제강점기는 그 어느 때보다 고생스러웠다. 일제의 수탈은 사람들의 삶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장 풍요로워야 할 가을 추수 때에는 일부러 달빛도 없는 한 밤을 틈타 쌀을 짊어지고 옮겼는데 혹시 낮에 들고 다니다가는 뺏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강제적으로 토지측량을 벌였고, 지적도에 소유자 명을 쓰라 하였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