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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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𥖝 |
이칭/별칭 | 사결(士潔), 북창(北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성환 |
[정의]
조선 전기 포천 현감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 유의(儒醫), 선가(仙家).
[가계]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할아버지는 헌납 정탁이고, 아버지는 내의원 제조 정순붕(鄭順鵬)이다. 양녕 대군의 증손인 봉양 도정 정종남의 외손이다.
[활동 사항]
정렴(鄭石+廉)[1506~1549]은 1537년(중종 3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천문·지리·의서·복서(卜筮) 등에 능통하였고, 특히 약의 이치에 밝았다. 장악원 주부로 가곡을 지도하는 한편, 관상감·혜민서의 교수를 겸임하였다. 1544년(중종 39) 왕의 병 치료를 목적으로 약을 제조하려고 내의원 제조들의 추천을 받아 입진(入診)하기도 하였다. 포천 현감을 지냈다.
장유(張維)가 그를 일러,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 숨어 사는 선비로서 중청과 중권에 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생과 고옥”이라고 하였다. 또한 “공은 태어날 때부터 신령스럽고 특이하였으며 널리 유·불·선 3교에 널리 통하였는데, 이것을 서로 비슷한 도로 수습하여 그 이치를 깨우쳐 선을 터득하였으나, 인륜 강상과 행동은 한결같이 우리 유도를 근본으로 폈다.”고 하였다. 더하여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는데 중국 사람들을 보고는 중국말로 응대하였으며, 외국의 사신을 만나면 외국어로 말하였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한 후에 내려오면 산 아래 100리 사이의 모든 일은 눈으로 보는 것같이 훤하게 알곤 하였다”고 하였다.
[학문과 저술]
일상 경험에서의 처방을 모아 편찬하였다는 『정북창방(鄭北窓方)』이 있었으나 유실되었는데, 이 책은 양예수(楊禮壽)가 지은 『의림촬요(醫林撮要)』에 인용되어 있다.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결서인 『북창비결(北窓祕訣)』이 전해지는데, 난세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암시하고 있다.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에는 “허심탄회하고 고명하여 선천적으로 빼어난 재주를 타고난 듯하였다. 성학으로 주장을 삼고 이를 마음의 근본으로 삼아 항상 이르기를 ‘성인의 학문이라는 것은 인륜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 밖의 오묘한 진리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다. 선교와 불교 또한 대동소이하다’고 말하였다.”는 평이 실려 있다.
성수익(成壽益)의 『삼현주옥(三賢珠玉)』에는 “북창 선생의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음은 신인이다. 일찍이 중국에 갔을 때 유구의 사신을 만났는데 사신 역시 특이한 사람이었다. 한 번 북창 선생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크게 놀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책자에 기록된 ‘모년 모월 모시에 중국에 들어가면 진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글을 보이면서 북창 선생에게 말하기를 ‘바로 진인이란 공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하였다. 그 사람은 역학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북창 선생과 더불어 역을 논하는데 통역을 기다리지 않고 유창한 그 나라 말로 통하였다. ‘노자가 말한바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천하의 일을 모두 알았다’는 것은 빈 말이 아니다.”라는 일화가 실려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산90에 있다. 비문은 6세손 정헌대부 예조 판서 정광한(鄭光漢)이 짓고, 8세손 가선대부 이조 참판 겸 규장각 직제학 정민시(鄭民始)가 써서 1779년(정조 3)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