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1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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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宗市-錦江 |
분야 | 지리/인문 지리,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광수 |
[세종시와 금강]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897m] 동쪽 사면에 있는 뜬봉샘에서 발원하며,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도삼리와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를 연결한 금강하굿둑을 경유하여 서해로 유입된다. 금강의 국가하천 유로연장은 397.9㎞, 지방하천은 42.81㎞로 우리나라 6대 하천의 하나이자 남한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다. 장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상류의 진안·무주·금산·영동·옥천을 거쳐 중류의 대전·청주·세종·공주·부여를 경유하고 하류의 논산·익산·서천·군산 지역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금강의 구조물로는 상류에 2001년 10월 13일 다목적댐으로 완공된 용담댐이 있고, 중류에는 4대강 유역 수자원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1980년 12월에 완공된 대청댐이 있다. 금강 수위관리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하여 금강의 세 곳에 보를 설치하였다. 세종보는 세종특별자치시 세종공원 맞은편에 있고, 공주보는 공주시 웅진동과 우성면 평목리를 잇는 곳에 있다. 백제보는 충청남도 부여군 정동리와 청양군 청남면 왕진리 사이에 설치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를 경유하는 금강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과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의 면계에서부터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동과 경계를 이루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까지 26.7㎞에 이른다. 금강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불리기 전에는 구간마다 다양하게 불렸다. 부강면 노호리로 유입되는 곳의 금강은 매호(梅湖), 금호리 앞은 검담(黔潭), 현 부강면 면소재지 앞 금강은 부용강(芙蓉江), 미호천과 만나는 합강리 앞 구간은 초강(楚江)이라 하였다. 미호천과 합수되는 곳에서부터 예전 양화리 앞 금강까지는 삼기강(三岐江)이라 불렀고, 독락정 앞 강은 독락강·라강이라 하였다.
[금강과 나루]
금강에 다리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나루를 통하여 강 건너 마을과 소통하였다. 주로 인근의 재래시장을 왕래하기 위한 나루였고, 학생들의 통학을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강 건너에 토지를 두고 있는 경우 마을에서 배를 마련하여 나루를 운영하였다. 5일마다 개설되는 재래시장은 인근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직접 재배한 채소나 곡물류뿐만 아니라 소, 돼지, 염소 등 가축을 운반하여 매매하는 것이 삶을 영위하는 기본적인 방법이었다. 대부분 도보로 이동하여 나루를 건너고 또다시 도보로 이동하였다. 1929년 기록에 의하면 강경시장과 접해 있는 황산나루의 경우 1일 최대 통행인이 1,300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강경이라는 큰 규모의 시장이었기에 가능한 규모이다. 연기 지역의 경우 부강장과 대평장이 형성되어 있던 점을 고려하면 이곳 시장을 이용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나루를 통해서 이동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부강은 금강의 소강 종점으로 규모가 큰 시장이었으며, 포구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관할 금강 본류에는 말미개나루, 쇠일나루, 검시나루, 선말나루, 새오개나루, 빙이나루, 구들기나루, 용댕이나루, 부용나루, 골뱅이나루, 앵청이나루, 서근수나루, 나성나루, 한림정나루, 원호나루, 불티나루가 있었다. 미호천에는 동진나루, 독쟁이나루, 꽃벼루나루가 있었다.
대로상의 나루는 현 나성동에 있던 나성나루로, 인근에 독락정이 있어 일명 ‘독락정나루’라고 불렀다. 나성나루는 천안~전의~연기~진잠을 연결하는 대로상에 있었다. 예전 연기현에서 금사역을 거쳐 나성리에서 나루를 건너면 금남면 대평리였다. 이곳에서 왼쪽은 회덕으로 가는 길이었고 오른쪽은 진잠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따라서 나성나루는 위로는 연기와 전의로 통하고 아래로는 회덕과 진잠으로 통하던 중요한 나루였다. 연기에서 청주로 가기 위하여 이용한 나루는 동진나루였다. 동진나루는 연기현에서 보통리를 경유하여 내판~저산역~청주로 통하는 길에 있었다. 금강의 나룻배는 오랫동안 주민들의 발이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버스 운행이 시작되면서 나루는 쇠퇴하였다.
[금강과 상업]
18세기 초반에 공주를 기준으로 상류는 금강을 활용한 수운이 발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은 “공주 상류에는 배가 통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부강포구가 조금 더 후대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1910년대 『조선지지자료』의 기록에서는 부강을 포구로 명시하였다. 부강포의 위치를 ‘충청남도 공주군 명탄면 도중(島中)’이라 하였다. 도중은 현 부강리 금강 가에 있던 마을이었다.
포구는 상업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공급과 소비가 이루어지기 위한 여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1830년대 기록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 부강장이 명탄면에 매월 1일과 6일 개설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 이른 시기인 1759~1763년에 쓰인 『열읍원우사적』에는 「공주부강영당사실성책」이 수록되어 있고, 「공주부강영당사실성책」 사실편에는 ‘강변 장시로 호남과 호서 사이의 큰 도회’라 하였다. 강변 장시는 도중으로 여겨지며, 정기적으로 열린 시장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부강 강변에 상거래 공간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의 경우 조류의 영향을 받는 구간은 하구에서 부여군 규암까지 64㎞였다. 이곳까지는 200섬 적재 이하의 선박 운항이 가능한 구간이었다. 조류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부여에서 공주까지는 100섬 적재 이하의 선박이 운항하였고, 공주에서 부강까지는 60섬 적재 선박 운항이 가능하였다. 부강 이상까지 선박 운항이 가능한 것으로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크게 활발하지는 않았다. 부강 상류로는 여울이 많고 토사가 쌓인 곳이 많아 배의 통행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입지와 자연 조건은 부강을 내륙 포구로 성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화물을 수송하던 역할이 바뀌었다. 1930년대에 들어 강바닥이 토사로 높아져 배의 운항이 어렵게 되면서 부강은 자연스럽게 포구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1929년에 작성된 『조선하천조사서』에 의하면 부강포와 대평나루의 주요 반출물은 곡물이었고, 주된 반입물은 소금이었다. 무엇보다 부강포구는 인근 청주나 보은, 옥천 등 내륙 깊숙이 소금과 어패류를 공급하던 포구로서 기능하였다. 당시 거래된 화물은 부강포가 413톤, 대평나루가 375톤으로 금강의 다른 나루에 비하여 많은 편은 아니었다. 하류의 대표적인 포구이던 강경포구는 9만 3,110톤으로 규모를 비교할 수 있다.
[금강의 정자]
금강의 자연경관은 그 자체로도 빼어난 곳이 많다. 옛 선인들은 경관이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자연미에 인공미를 더하고 그곳에서 풍류를 즐겼다. 세종특별자치시 관할 정자로는 부강면 금호리의 보만정(保晩亭), 연동면 합강리의 합강정(合江亭), 연기면 세종리의 제산정(霽山亭), 한솔동의 송월정(松月亭), 나성동의 독락정(獨樂亭), 금남면 영곡리의 한림정(翰林亭), 장군면 금암리의 금벽정(錦碧亭) 등이 있다. 송월정만 금강에서 조금 먼 곳에 있었고 나머지 정자는 금강가에 있었다.
보만정은 1669년(현종10) 동춘당 송준길이 64세 때 지은 정자이다. 강학(講學)과 유식(遊息)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보만정은 늙어서도 자기의 행실을 깨끗이 지켜 나가고 옳은 길로 나아가자는 의미이다. 송준길 사후 22년 뒤 인근 유생들에 의해 검담서원이 건립되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자는 서원의 부속 건물로 취급되다가 1871년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서원이 철폐된 후 현재 묘정비와 함께 남게 되었다.
합강정은 금강과 미호천이 만나는 합강에 있었다고 하나 고지도에 구지(舊地)로만 등재되어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다. 1772년 연기현읍지에 금무(今無)로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연기면 세종리 소재 제산정은 1919년 제산 임영휴의 아들 임헌두가 지은 정자이다. 비서원승(祕書院丞)을 지낸 임영휴가 1905년 이후 조용히 지내면서 정자를 지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들 임헌두가 건립한 것이다.
송월정은 17세기 경 임우설(林遇卨)이 지은 정자이다. 임우설은 서당을 짓고 종파의 자제들이 돈을 내지 않고도 글을 배우게 하였으며, 서당 근처에 송월정을 건립하고 여름철에 독서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독락정은 1430년대에 임목(林穆)이 지은 정자로, 송나라 사마광이 은퇴 후에 만든 독락원(獨樂園)에서 명칭이 유래하였다. 임목이 벼슬을 그만두고 나성동으로 돌아와 임난수 장군의 가묘와 정각을 짓고 독락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독락정은 한양으로 이르는 도로에 접하여 있고 지근거리에 나루가 있어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와 시인 묵객의 안식처가 된 곳이었다.
영곡리 한림정은 평산신씨 문중이 건립한 정자이다. 영곡리의 입향조인 한림학사 신준미가 기묘사화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신준미 생전에 정자를 건립하지 못하고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정자는 1964년 한양공파 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금벽정은 이중환의 택리지에 조상서댁 정자로 기록되었으나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정자의 남쪽 앞면은 금강을 끼고 도는 창벽이 시야에 확 펼쳐지는 등 경관이 우수한 곳이다. 많은 시인 묵객이 방문하였을 것이나 여러 번 이전하였고 1982년 철거하여 마곡사 보수용 목재로 활용되었다.
[금강의 현재적 의미]
세종특별자치시는 전월산과 원수산을 배산으로 하고 금강을 임수로 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리적 형국에 자리한다. 세종특별자치시의 금강 양안은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어 곡창지대를 이루었다. 풍족한 금강의 수원은 연기면의 장남평야와 금남면의 들녘을 적셨고, 주민들은 사시사철 금강이 주는 혜택을 누리고 살았다. 금강은 애환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여름이면 물놀이 장소가 되었고 때로는 물고기를 잡아 부족한 양식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강은 예고 없이 범람하여 농토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인명까지 앗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흙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만 바라보고 살던 옛 사람들에게 금강은 삶의 모두였다.
재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금강에 댐을 막아 홍수를 조절하며 생활용수와 공업·농업용수로 활용하는 등 치수(治水)와 수리(水利)에 주력하였다. 이 경우에도 명암이 갈렸다. 다목적댐으로 건설된 용담댐과 대청댐은 수자원 확보라는 긍정적 결과뿐만 아니라 담수호가 지닌 여러 부정적인 문제를 야기하였다. 수위 조절과 농업용수를 위하여 만들어진 보는 여러 가지 폐단이 드러나면서 존폐 위기에 처하였다.
과거 금강은 물산의 유통을 담당하던 서해 내륙지역의 동맥이었다. 도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 금강은 빠르고 편리한 교통로였다. 부강포구는 내륙 깊숙이 생필품과 소금, 해산물을 유통하는 소강 종점 포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제는 금강이 교통로나 상업을 위한 물길로 활용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나룻배로 소통하던 곳에는 견고한 다리가 놓여 통행을 돕고 있다. 배를 타기 위하여 강 건너 사공을 부르던 나그네의 모습은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장꾼과 상인들의 호객으로 시끄러운 고함이 오고 가던 강경포구와 갓개포구, 부강포구도 옛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시대가 달라진 것처럼 금강의 모습도 달라졌다. 7년 주기로 범람하던 강물은 이제 댐에 갇혔다. 금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 온 원주민과 달리 세종특별자치시에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은 새로운 금강을 요구한다. 따라서 금강은 농경문화의 역사적 상징성에 안주할 수가 없다. 전형적인 농촌에서 최첨단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에 걸맞은 패러다임이 절실하다.
금빛 모래를 자랑하던 세종특별자치시 지역의 금강은 대청댐으로 인하여 유량이 차단되었다. 모래톱은 사라지고 토사가 쌓여 나무와 풀이 자라면서 초지로 변하고 말았다. 대표적인 곳이 미호천과 금강이 만나는 합강 유역의 습지이다. 유량이 많던 예전에는 물길이 자주 바뀌면서 강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제 물길을 바꿀 만한 유량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습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가고 있다. 자연 상태의 습지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시민들의 생태교육과 힐링을 위한 장소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금강의 둔치는 대부분 수변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금강이 도심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장점을 살려 다양한 테마공원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에 의지하고 사는 동식물이 인간과 더불어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위적인 구조물은 생태계 보전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강에는 가능한 한 인공 구조물을 만들면 안 된다. 정부세종청사와 금강 사이에 조성된 세종호수공원과 국립세종수목원은 새로운 생태공간으로,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문화공간이어야 한다.
금강에 많은 다리가 놓였다. 예전에는 나룻배로 강을 건너던 곳 이외에는 양안에 접근할 수 있는 도로가 없었다. 이제는 필요에 따라 길을 내고 다리를 가설한다. 다리 가설로 강에 있던 여울도 사라졌다. 여울이 사라지자 여울에 의지하고 살던 물고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금강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하여야 할 일은 수질 개선이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금강의 물이 오염되지 않아 식수로 사용하였다. 건강한 금강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가 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