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6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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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平里陶窯址 |
이칭/별칭 | 앞동산노랑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 59-1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현문필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5년 10월 5일 - 신평리도요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8-3호, 4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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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신평리도요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재지정 |
소재지 | 신평리도요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 59-1번지 외 1필지 |
성격 | 옹기 가마터 |
양식 | 돌가마 |
크기(높이) | 180㎝ |
길이 | 잔존길이 1,605㎝ |
둘레 | 너비 610㎝ |
소유자 | 사유 |
관리자 | 사유 |
문화재 지정 번호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에 있는 고려 시대 옹기 가마.
[개설]
제주 사람들은 가마[窯]를 ‘굴(窟)’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가마에서 생산된 그릇의 빛깔에 따라 ‘노랑굴’과 ‘검은굴’로 구분한다. 신평리도요지는 속칭 ‘앞동산’이란 곳에 있어 ‘앞동산노랑굴’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가마는 대략 18°의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아궁이부터 뒷구멍까지 가마의 전체 규모를 알 수 있는데, 잔존 길이는 약 16m이고, 소성실의 너비는 1.56m이다.
과수원의 진입로를 만들면서 부장쟁이·아궁이·부장[연소실]의 시설은 파괴되었다. 현재는 부장 일부와 불벽[격벽]·소성실[번조실]·잿불구멍[창불구멍]·뒷구멍[배연구·굴뚝]·출입구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가마벽과 천장은 현무암과 점토로 축조되었다.
가마에서는 1,100℃가 넘는 높은 온도에서 노란 빛깔을 감도는 허벅·통개·장태·고소리·펭 등 다양한 일상용기들이 생산되었다.
[위치]
신평리도요지는 추사 적거지가 있는 대정현성에서 신평리 마을 방향으로 약 2.1㎞ 지점에서 우측으로 난 추사로 270번길을 이용해 약 300m 정도 올라가 우측의 농로로 약 130m 가면 농로 좌측 50m 지점에 자리한다.
행정구역상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 59-1번지[외 1필지]에 위치한다. 그리고 신평리도요지 2호의 경우, 속칭 '앞동산굴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요지는 '앞동산굴터'에 현존해 있는 노랑굴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행정구역상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 56번지에 위치한다.
[형태]
신평리도요지에는 아궁이를 통해 집어넣은 연료를 태우는 부장과 그릇을 쌓고 굽는 소성실의 경계에는 점토와 돌을 이용하여 쌓은 불벽이 있다. 불벽의 좌우에는 ‘∩’모양의 불구멍을 두어, 부장의 불길을 소성실로 고루 보내도록 했다.
불벽이 끝나는 가마 우측에는 가마 내부로 들어가고 나오는 아치형의 출입구를 두었다. 가마의 벽체는 크고 작은 현무암을 이용해 두껍게 쌓아 점토로 마감하고, 천장은 판석 모양의 현무암과 점토를 사용하여 아치형으로 만들었다.
가마벽 상단의 양쪽에는 소성실에서 그릇이 구워지는 상태를 확인하는 잿불구멍이 있다. 가마 안의 연기가 빠져 나가는 귓구멍은 뒷벽의 유실로 있었던 흔적만 남아 있다.
신평리 도요리 2호의 도요는 손실되어 지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매립되어 있다. 정밀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유구도 파악될 것으로 보인다. 도요는 남고북저의 지형을 따라 앞쪽은 낮고 뒤쪽은 높게 만들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서쪽으로 약 20m 떨어진 노랑굴과 전체 주변 상황을 감안하였을 때 현존의 노랑굴 보다 앞선 시기에 축조되었던 도요일 가능성이 있다
[현황]
신평리도요지는 지난 2005년 10월 5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8-3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가마는 보호 펜스를 세워 관리하고 있지만, 소성실의 천정은 일부 유실된 상태이다. 주변 경작지에서 옹기편들이 확인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신평리도요지는 일부 훼손 되었으나 현존하는 도요지[노랑굴]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편에 속한다. 특히 신평리도요지는 인접한 곳에서 이보다 앞선 다른 가마터[신평리도요지 2호]들도 확인되고 있어 제주옹기 변화의 선후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