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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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和寧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숙정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 있었던 독립 운동 단체.
[설립 목적]
화령회는 ‘민족정신의 고취, 독립에 관한 토론, 모든 기회를 포착하여 항일, 해외 독립투사들과의 긴밀한 연락, 일제 타도의 선도적 역할로 민족의 독립 쟁취’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942년 민족의식을 고취해온 박래은(朴来殷) 선생이 체포되자 이에 분노한 순창 농림 학교 학생들이 화령회를 만들었다. 당시 3학년이었던 이희동을 대표로 민병호(閔丙浩), 홍석길(洪錫吉), 양태철(梁態喆), 이병기(李秉起), 진강욱(晉岡旭), 노필식(盧必熄), 서선표(徐先杓), 서규선(徐圭善), 홍상근(洪相根), 신영식(申永植), 신병식(申丙植), 정영조(鄭永祚), 김용철(金容哲) 등 14명이 조직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광주 사범 학교에 진학한 홍완표(洪玩杓), 조영철(曺泳徹)[전주 사범 학교], 홍성길(洪性吉)[전주 북중학교] 등이 화령회의 지엽 조직을 담당하여 각자의 학교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제휴해 나갔다. 회장 이희동은 교실 칠판에 “우리는 화령 신민이다”라는 글을 썼고 민병호, 진강욱, 노필식 등은 일본인을 때려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
홍석길은 1943년 7월에 학교를 자퇴하고 해주 일본인 상점에 위장 취업하였고, 만주와 중국 등지의 애국지사들과 접선하는 사명을 띠고 파견되었다. 그러나 홍석길은 순창에서 거사 후 해주로 밀행하라는 연락문을 동지들에게 발송했다가 화령회의 존재 발각과 함께 검거되었다. 1차로 1943년 12월 이희동, 민병호, 홍완표, 조영철, 홍성길, 김영규(金永圭)[전주 농림 학교]가 잡혀가 구속되었고 2차로는 순창 농림 학교 학생 40여 명과 관련자 40명이 잡혀갔다.
관련자의 구속으로 조직이 일시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1944년 당시는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시기라 회원들은 용기백배하여 ‘① 농촌에 침투하여 일제 강제 징병, 징용을 기피하도록 선동한다, ② 농민들에게 식량 공출을 거부하도록 선동한다, ③ 일제의 군용기 제작을 위한 일체의 헌금 헌납을 반대하도록 선동한다, ④ 기회를 포착하여 일인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독립 만세를 부른다, ⑤ 거사 후 만주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 정부 및 광복군에 투신한다’ 등의 다섯 가지 규정을 정하고 활발히 활동하였다.
[현황]
독립 투쟁을 활발히 했던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공적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이희동[1990년 애족장]을 제외하고는 독립 훈장을 받은 사람이 없다.
[의의와 평가]
박래은 교사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교육에 감화 받은 순창 학생들의 치열한 투쟁은 민족 독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