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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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淳昌客舍 |
이칭/별칭 | 옥천지관(玉川之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창7길 40[순화리 31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59년 - 순창객사 중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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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74년 9월 27일 - 순창객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순창객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14년 - 순창객사 현판 교체 |
현 소재지 | 순창객사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창7길 40[순화리 313] |
성격 | 객사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정당]|5칸[동대청] |
측면 칸수 | 3칸[정당]|2칸[동대청]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객사.
[개설]
객사(客舍)는 조선 시대에 관청의 손님이나 사신이 머물던 곳이다. 새로 부임한 수령은 반드시 객사에 와서 참배를 해야 했으며, 국상(國喪)을 당한 때에도 궐패(闕牌)[조선 시대에, 중국 황제를 상징한 ‘闕’ 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패]에 망배(望拜)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읍의 무성 서원(武城書院)에서 임병찬(林炳瓚)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켜 순창객사(淳昌客舍)에 진을 치고 일본군 및 시위대에 맞서 격전을 벌였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항일 의병 본부로 사용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힌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위치]
순창객사는 순창군 순창읍 순창7길 40[순화리 313] 순창군청 옆 순창 초등학교 내에 있다.
[변천]
순창객사가 처음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고, 현재의 건물은 1759년(영조 35)에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순창 공립 보통학교, 8.15광복 후 1970년대 말까지 순창 초등학교의 교실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 초 교실을 철거하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81년 2월 전면을 해체하여 기와를 깔고, 뒷면 북쪽 지붕의 서까래 일부를 완전 보수하였다. 1983년 11월 단청 공사를 하였으며, 1988년 9월 순창객사 벽체를 보수하였고 주변에 철책을 설치하였다. 1991년 순창객사 뒷면의 기와를 깔고 동대청의 일부 서까래를 교체하였으며, 1996년 11월 단청을 다시 칠하였다.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여러 차례 순창객사 주변 정비 사업을 실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원래는 가운데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東大廳), 오른쪽에 서대청(西大廳), 앞쪽에 중문(中門)과 외문(外門),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둥은 민흘림기둥이고, 주춧돌은 장대석(長臺石) 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덤벙 주초이다. 건물은 포작(包作) 형태로 보아 익공집이면서도 외목도리를 하여 처마를 길게 밖으로 빼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동대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서대청은 없어졌으며, 나머지 건물은 초등학교 교실로 사용하기 위해 정당과 동대청 사이에 앞뒤 벽을 만들어 맞배지붕의 형태로 처리한 탓에 얼핏 보면 팔작지붕에 맞배지붕을 단 것처럼 보인다. 건물 내부는 한때 순창 초등학교에서 교실로 사용하기 위해 천장에 판자를 넣어 우물천장으로 만들었다.
[현황]
원래는 정당 안에 벽돌을 깔고 ‘전하 만만세(殿下萬萬歲)’라 쓴 궐패(闕牌)를 봉안하여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나라에 일이 있을 때 궁궐을 향해 절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석도 궐패도 없으며, 한때 교실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외형과 실내가 원래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순창객사는 비어 있는데, 순창군청 옆에 있어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한편 동대청 건물에 걸려 있었던 '순화아문(淳化衙門)'이라는 현판은 원래 순창 관아 출입문이었던 수옥루(漱玉樓)에 걸려 있던 것이다. 8.15 광복 후 찾을 수 없었던 ‘순창객사’ 현판 대신에 지금까지 걸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그동안 전주 객사인 ‘풍패지관(豊沛之館)’처럼 순창객사를 의미하는 제대로 된 현판을 걸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순창군에서는 조선 시대 지방 행정 중심 공간으로서의 순창객사를 상징할 수 있는 새로운 현판을 제작하고자 관련 자료 검토와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자문을 받았다. 이 결과 마한시대 순창의 지명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옥천(玉川)’을 사용한 '옥천지관(玉川之館)'으로 현판 명칭을 정하고, 2014년 12월 30일에 새로 현판을 걸고, 현판식을 가졌다. 이날 현판식에는 황숙주 순창 군수, 이기자 순창군의회 의장, 양상화 삼인 문화 선양회장, 김기곤 순창 문화원장, 김영배 순창 노인회장, 김갑용 순창 향교 전교 등이 참석했다.
자료 제공(순창 군청 문화 관광과 강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