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7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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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裕全生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 하마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미연 |
소재지 | 박유전 생가 터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 하마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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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생가 터 |
소유자 | 문중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 하마 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명창 박유전의 생가 터.
[개설]
판소리의 대가닥을 이룬 서편 소리의 비조(鼻祖)이며, 말년의 소리는 보성 소리의 토대가 되었으니, 판소리사에서 박유전(朴裕全) 명창의 업적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박유전은 1835년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 마재 마을[현재의 하마 마을]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소리 하는 것을 천대시한 집안의 반대와 멸시로 고향을 떠나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자리를 잡아 판소리로 명성을 날렸으며, 1860년대에 상경하여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총애를 받으며 활동하였다. 흥선 대원군이 “네가 제일강산(第一江山)이다.”라고 극찬하고 선달 벼슬과 ‘강산’이라는 아호를 하사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발굴 조사 경위 결과]
현재까지 발굴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황]
하마 마을의 초입 당산 나무 아래에 이곳이 서편제(西便制)의 창시자 박유전이 태어난 마을임을 알리는 알림판이 있을 뿐이다. 하마 마을에는 최근까지 박유전의 5대 종손이라고 하는 박병섭이 기거하였지만 이제는 사망하고 동네에는 사촌 후손들마저 찾을 수가 없다.
박유전 생가 터가 방치되고 있는 것에 대해 마을 주민 정훈구는 “현재 생가는 물론 주변 대지들도 종가의 여러 사람들에게 분리되어 소유권이 있는 관계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제라도 순창군에서 나서서 이곳을 성지화하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진단하였다.
생가지로 알려진 가옥은 슬레이트 지붕과 현대식 새시 등으로 건립되어 현대적인 건물이 되어 있다. 더욱이 판소리를 향해 치열한 득음을 기울였던 집 앞마당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이곳이 그 유명한 박유전의 생가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방치된 모습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14살까지 성장한 박유전 생가는 이제 후손도 없어 앞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으면 안내판이 유일한 박유전을 알려 주는 창구가 될 듯싶다.
특히 마을 주민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대학생과 판소리 전공자들이 버스를 대절해 마을을 찾아와 태생지를 보고 초라한 현실에 놀라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이 앞섰다.”며 “이번 기회에 박유전 명창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군과 민, 그리고 학계에서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
더욱이 박유전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높다할 수 있다. 19세기 판소리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박유전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동편제와 서편제의 구분이 박유전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 박유전의 자취를 순창에서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순창군을 홍보하는 안내 책자와 생가가 있는 현지에 서 있는 안내판이 고작이다. 한국의 대표적 전통 문화이며 세계가 인정한 판소리의 여명을 열었던 박유전에 대한 현실은 ‘우리 것’에 대한 냉담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우리나라 판소리는 19세기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동편제와 서편제 등으로 소리가 다양화 되었다. 그러나 판소리의 경우 마을과 지역 중심으로 전승되는 농악과 달리 명창을 중심으로 소수에 의해 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지역적 구분이 쉽지 않다. 특히 현대에 들어서 교통의 발달과 소리 문화의 도시화 등으로 지역적 구분은 전혀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판소리 유적지의 가치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판소리 명창의 유적은 보존할 가치가 크다. 서편제의 거두였던 박유전 생가 터와 득음을 향하였던 고향 마을을 성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박유전의 유적지 조성과 추모비 건립 등을 통해 그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하고 있지만 정작 고향이자 판소리의 탯자리인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의 생가 터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제라도 온존하지는 않지만 박유전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는 생가, 그리고 득음을 치열하게 추구하였던 앞마당과 주변을 정리해야만 박유전을 되새겨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