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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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應聖忠節碑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노동리 산51-4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서홍식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57년 - 한응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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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한응성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892년 - 한응성 충절비 건립 |
현 소재지 | 한응성 충절비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노동리 산51-4 |
성격 | 비 |
관련 인물 | 한응성(韓應聖)[1557~1592]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너비,두께) | 182㎝[높이]|46㎝[너비]|14㎝[두께] |
소유자 | 청주 한씨 종중 |
관리자 | 청주 한씨 종중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노동리에 있는 한응성을 기리기 위해 개항기에 세운 충절비.
[개설]
한응성(韓應聖)[1557~1592]은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자는 경기(景期)이며, 호는 구와(龜窩)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정리한 뒤 의병을 조직하여 스승인 조헌(趙憲)의 휘하로 들어갔다. 금산 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적과 싸우다가 칠백 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건립 경위]
한응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92년(고종 29) 5월에 정려를 명하고, 이조 참의에 추증하였다. 12세손의 사손인 한동석(韓東錫)이 비각과 비를 세웠다. 비각 안에는 같은 해 8월에 정려된 효자 한형엽(韓亨燁)의 비가 함께 있다.
[위치]
순창군 순창읍에서 장덕리를 거쳐 인계면 노동리를 향해 가면 우측에 인계 농공 단지가 보인다. 계속 직진하면 순창군 인계면 노동리가 나오는데, 노동리 마을 회관 못 미쳐 오른쪽 길가에 한응성 충절비(韓應聖忠節碑)가 있다. 주소지는 순창군 인계면 노동리 산51-4번지이다.
[형태]
비석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지은 정려각 안에 세워져 있다. 장방형 좌대(座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옥개석(屋蓋石)을 올렸다. 재질은 모두 화강암이다. 비의 크기는 높이 182㎝, 너비 46㎝, 두께 14㎝이다. 좌대는 비신의 크기에 비해 작은 편이며, 옥개석 역시 비신에 비해 좁은 편으로 처마의 반전이 심하다. 전면의 음각으로 새긴 글씨에는 붉은 페인트로 칠을 하였으며 마모가 심하다.
[금석문]
비의 전면에 ‘증 통정대부 이조 참의 겸 시강원 보덕 한응성 지려(贈通政大夫吏曹參議兼侍講院輔德韓應聖之閭)’라고 해서체로 새겼다. 세 줄로 썼으며 글씨는 앞면 전체에 가득 차게 큰 글자로 쓰여 있다. 뒷면에 2줄로 건립 연도 등을 새겼는데, 박락이 심하여 판독하기 매우 힘들다.
[현황]
현재 화강암의 거친 재질과 마모 상태가 심하여 뒷면의 글씨는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특히 하단부의 마모가 빠르게 진행 중이며, 이러한 현상은 전면·후면이 비슷하다. 판독이 어려운 상태라 글자의 획을 붉은 페인트로 칠하였으나 하단부의 자획은 여전히 판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청주 한씨(淸州韓氏) 종중에서 소유하여 관리한다.
[의의와 평가]
한응성은 조선이 왜구들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한 충신이다. 이를 기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충신의 정려를 내렸으며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으니, 국가적 차원의 금석문으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