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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오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892
한자 海州吳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집성지 해주 오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용전리 지도보기
성씨시조 오인유(吳仁裕)
입향시조 오방열(吳邦悅)

[정의]

오인유를 시조로 하고 오방열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오인유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해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해주 오씨 입향조는 완월당(翫月堂) 오응정(吳應鼎)의 후손인 남은(南隱) 오방열(吳邦悅)이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3만 1399가구, 42만 2735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해주는 황해도 남해안에 위치한 도청 소재지이다. 해주 오씨는 오현보(吳賢輔)와 오인유를 각각 시조로 하는 두 개의 파가 있다. 오현보는 오씨의 비조 오첨(吳瞻)의 24세손이다. 500년(지증왕 1) 오첨이 중국에서 신라에 들어와 함양에서 살면서 오씨의 연원을 이루었다. 오첨의 24세 오현보·오현좌(吳賢佐)·오현필(吳賢弼) 삼형제가 1216년(고종 3) 거란을 토벌한 공으로 오현보는 해주군(海州君), 오현좌는 동복군(同福君), 오현필은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짐에 따라 해주, 동복, 보성의 오씨로 각각 분적하면서 오현보는 해주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오인유는 본래 중국 송(宋)나라 학사로 984년(성종 3) 고려에 들어와 검교 군기감을 역임하였는데, 황해도 해주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해주를 본관으로 삼고 계세하여 왔다. 두 인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 관계가 불확실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오현보를 시조로 보는 해주 오씨의 세계표에는 오인유가 오현보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634년(인조 12) 간행된 『해주 오씨 족보』 초간본[갑술보(甲戌譜)] 이래 모든 『해주 오씨 족보』에서 오인유를 시조로 하고 있고, 오인유의 선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1401년(태종 1) 오선경(吳先敬)이 작성한 「해주 오씨 족도(海州吳氏族圖)」에 근거하고 있는 바, 해주 오씨의 족도는 가로 112㎝, 세로 115㎝ 크기의 장지(壯紙), 필사본으로 특별한 체제에 구애되지 않고 대수에 따라 종으로 후손들을 도식한 초기 형태의 족보이다. 이 족도에 국한한다면 해주 오씨의 시조는 오인유라 할 수 있겠으나, 오선경이 발문에서 오인유 이전의 세계가 담긴 속적(屬籍)이 우씨(禹氏)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 대목이 있어 오인유 시조 설에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순창 지역에 입향한 해주 오씨는 오인유를 시조로 하는 오응정의 후손들이다. 오응정은 1574년(선조 7)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에 몽진(蒙塵)[임금이 난시에 피난함]할 때 호종하였고, 수탄장(守灘將)으로 평양 탈환전에 참가하였으며, 1594년(선조 27) 중군이 되어 전공으로 상을 받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행호군으로 전라도 순천을 수비하고, 이어서 남원을 수비하다 전사하였다. 한성부 좌윤에 추증되었으며, 남원과 금산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입향 경위]

오방열이 조선 후기에 쌍치면 용전리 묵산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 해주 오씨는 179가구, 4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순창 지역의 해주 오씨쌍치면 용전리 묵산 마을에 15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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