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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016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in Suncheon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in Suncheon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in Suncheo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용환

[정의]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유교 활동의 전개 과정 및 특징.

[개설]

순천 지역 유교는 정치적 사화에 의한 유배, 왜적에 대항하는 의병 활동, 아름다운 자연에서 유유자적한 삶 등으로 요약된다.

[유배와 은거, 그리고 사림의 형성]

순천시 옥천동에 가면 옥천(玉川)이라는 맑은 물이 난봉산에서 발원해 옛 순천부읍성 남쪽으로 흐르는 데, 거기에는 조선시대 사림의 도학 정신이 깃들어 있다. 1498년(연산군 4)에 발생한 무오사화로 인해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조위는 순천부읍성 서문 밖에 거처하면서 순천 지역 유림과 함께 옥천에 나아가 도학자로서 삶을 관조하였고, 1년 늦게 유배 온 김굉필은 북문 밖에 거처했다.

김굉필은 종종 홀로 계곡 가에 나가 소요했으나 시는 읊지 않고 경(敬)을 통한 수기(修己)의 태도를 엄격하게 유지했으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사약을 받고 순천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굉필의 순천 유배는 최산두나 유계린 같은 호남 사림파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인이자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림 및 도학의 정통성을 잇는 인물이다. 김굉필은 어려서부터 시와 문학을 멀리하고 소학동자로 불릴 만큼 『소학』에 기초해 함양·성찰 공부에 매진하였다. 김굉필은 신라·고려·조선 시대를 통틀어 동국 십팔현(十八賢) 중 한 명으로서 문묘종사(文廟從祀)에 포함되어 있으며, 옥천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다.

조위는 순천에 유배 와서 기거할 때에 순천 사람들과 서쪽 계곡[옥천]에 가서 고목 아래에 돌을 모아 대(臺)를 만들어 ‘임청대(臨淸臺)’라 이름을 붙였다. 조위는 읍에 거주하는 심종유(沈從柳), 양우평(梁禹平), 한인수(韓麟壽), 장자강(張自綱) 등과 진솔회(眞率會)를 만들어 임청대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즐겼으며, 1502년(연산군 8) 8월에 지은 「임청대기」를 통해 조위가 지닌 유자(儒者)로서 삶을 되뇌고 있다. 「임청대기」에서 조위옥천에 나아가 공자와 맹자의 흐르는 물에 대한 감탄을 회상하고, 도연명이 전원으로 돌아간 즐거움에 공감을 표한다. 조위는 정치적으로 사화를 당했지만 순천의 아름다운 산속 소에서 호연지기를 기르고자 하였다.

또한, 조위 역시 도학자로서 옥천의 맑은 물을 통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향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위김굉필과 함께 무오사화로 인해 순천으로 유배되었으나 오히려 시를 짓지 않더라도 옥천의 맑은 물에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 했다. 왜냐하면, 비록 조위가 정치적으로 사화를 당했지만, 도학자로서 호연지기를 보존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조위김굉필은 순천으로 유배된 이후에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선비의 모습을 잃지 않고 지켰다. 옥천의 맑은 물은 무언중에 이들의 안빈낙도 정신과 저절로 부합하였다.

구암(龜巖) 이정(李楨)[1512~1571]이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김굉필의 유지를 찾아 1565년(명종 20)에 경현당(景賢堂)을 짓고 임청대비(臨淸臺碑)를 세웠다. 임청대비 건립 사업에 을사사화 때 유배되어 죽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문인 매곡(梅谷) 배숙(裵璹)[1516~1589], 을사사화 때 유배길에 죽은 정자(鄭滋)[1515~1547]의 동생 정소(鄭沼)[1518~1572], 연산군의 폭정에 순천으로 온 허희인(許希仁)의 아들 허엄(許淹)[1538~1610], 정지년(鄭知年)의 후손 정사익(鄭思翊)[1542~1588] 등이 참여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 초기에 한가로운 전원으로 은둔하기 위해 혹은 정치적 박해인 사화에 의해 순천으로 이주해온 선비들이 많다. 인생 말년에 순천 부유촌(富有村)으로 이거한 조유(趙瑜)[1346~1428], 무오사화 이후에 이거해 동천 가에 오림정(五林亭)을 지었던 신윤보(申潤輔)[1483~1558], 기묘사화 즈음에 순천 황전면으로 이거한 박증손(朴曾孫)[1496~1573], 을사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되었던 노수신(盧守愼)[1515~1590] 등이 그러하다.

[왜적과 싸운 무공의 칭송]

순천 지역은 지리적 여건상 왜구의 침략이 자주 있었다. 그런 연유로 순천의 여러 서원과 사우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왜적을 물리치며 활약했던 의병이나 무신의 무공을 기리고 있다. 장윤(張潤)[1552~1593]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 3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순천읍성을 지켜냈다. 이후 영남 지역에 진군하여 성주성을 회복하고, 진주성에서 대장 황진이 적탄[적이 쏜 총알이나 포탄]에 전사하자 황진을 이은 대장이 되어 8일 밤낮을 싸우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윤의 위패가 순천시 저전동 정충사(旌忠祠)에 안치되어 있고, 장윤정려(張潤旌閭)순천시 승주읍 서평리에 있다. 이밖에도 왜적과 용맹하게 싸웠던 무공을 기리기 위해 충렬사허일(許鎰)[1549~1593], 이천서원에 박대붕(朴大鵬)[1525~1592], 율봉서원에 정숙(丁淑)과 정승조(丁承祖), 송천서원김대인(金大仁)과 김치모(金致慕) 등을 배향하고 있다.

[아름다운 산수에서 시 쓰기]

순천은 내우외환이 없는 평상시에 선비들이 아름다운 산수를 즐기면서 시를 읊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명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던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순천부사로 부임해오는 처음에 ‘남쪽 변방(南荒)’으로 간다고 하소연했지만, 1616년(광해군 8)부터 1619년 사이에 실제로 순천에 살면서 “순천은 풍광이 빼어난 곳[地理江南勝]’이라고 하거나 “곳곳의 산수가 혼연히 그림 같다[溪山處處渾如畫].”라고 찬탄하였다. 이수광이 순천에서 살면서 동천, 연자루, 환선정, 승주, 바닷가 등을 거닐며 지은 한시들이 『승평록』으로 편찬되었다. 이수광은 사후에 현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에 있는 청수서원(淸水書院)에 배향되었으나 지금은 훼철되고 없다. 이수광 외에도 순천사은(昇平四隱)으로 일컫는 배숙(裵璹)[1516~1589], 정소(鄭沼)[1518~1572], 허엄(許淹)[1538~1610], 정사익(鄭思翊)[1542~1588] 등을 포함해 많은 선비가 순천의 강산을 거닐면서 매난국죽의 맑은 향기 속에서 시를 읊으며 강학 활동을 했다.

[유교 유적]

순천에는 유교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있다. 문덕과 무공이 있는 선현을 배향하거나 후세 교육을 담당하는 유교 유적으로는 순천향교·낙안향교·옥천서원(玉川書院)·용강서원(龍堈書院)·이천서원(伊川書院)·곡수서원(曲水書院)·율봉서원(栗峰書院)·송천서원(松川書院)·미강서원(美岡書院)·겸천서원(謙川書院)·옥계서원(玉溪書院)·오천서원(鰲川書院)·충렬사(忠烈祠)·정충사(旌忠祠)·학산사(鶴山祠)·충민사(忠愍祠)·충무사(忠武祠)·월계사(月桂祠)·문천사(文泉祠)·육충사(六忠祠)·오림사(五林祠)·세수재(世守齋) 등이 있다.

순천의 산수를 감상하던 누정으로는 임청대(臨淸臺)·환선정(喚仙亭)·연자루(燕子樓)·양벽정(樣碧亭)·상호정(相好亭)·반구정(伴鷗亭)·영귀정(詠歸亭)·삼송정(三松亭)·만락정(晩樂亭)·초연정(超然亭)·이요정(二樂亭)·운곡당(雲谷堂)·염사당(廉士堂)·용파대(龍坡臺)·세심대(洗心臺) 등이 있다.

2018년에는 순천시 금곡동에 선비문화체험학습관이 건립되어 예절교실·한문교실·서예교실·인성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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