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5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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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應祗 |
영어공식명칭 | Seong Eung-ji |
영어음역 | Seong Eung-ji |
영어공식명칭 | Seong Eung-ji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욱 |
몰년 시기/일시 | 1594년 8월 29일 - 성응지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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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성응지 출생지 - 전라남도 순천시 |
학교|수학지 | 순천향교 - 전라남도 순천시 향교길 60[금곡동 182]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창녕(昌寧) |
대표 경력 | 의병장 |
[정의]
조선 후기 순천 출신의 의병.
[가계]
성응지(成應祉)[?~1594]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순천 출신이다. 성응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생몰연대 및 자세한 가계는 알 수 없다.
[활동 사항]
성응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순천향교의 유생 신분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전라좌수영에 자원 종군하여 이순신(李舜臣)[1545~1598] 수군절도사의 휘하에 들어가 임진왜란 해상전투에 참전하여 초기 해전의 승첩에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가운데 한산도와 전라좌수영을 왕래하면서 순천 지역으로부터 군량미를 모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는 통영까지 수송하기도 하였다.
1594년(선조 27) 3월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성응지의 의병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각별한 포상을 요청하였다. 당시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수군부대에 자원해 들어온 의병장 순천교생 성응지와 승장 수인(守仁)·의능(義能) 등은 이번 난리 통에 일신의 평안을 생각지 않고 의기를 격발하여 군사들을 모집, 각기 3백여 명씩을 이끌고 나라의 수치를 설욕하고자 하였으니 극히 가상합니다. 해상에서 싸운 지 2년 동안에 스스로 군량을 마련하여 두루 공급하며 근근이 이어댄 그 고초의 정상이야말로 관군들보다 배나 더했는데, 아직도 그 고생을 꺼리지 않고 지금 더욱더 애쓰고 있습니다. 전투 시에 적을 토벌하는 데 있어서도 또한 뚜렷한 군공이 있었으며 나라를 위해 의기를 떨친 마음은 시종 변함이 없으니 극히 가상합니다. 위의 성응지와 승장인 수인과 의능 등에게는 마땅히 조정에서 각별히 포상하여 후인들에게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장계의 내용을 통해 성응지가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이순신 휘하에서 2년여 동안 참전했으며, 군량을 마련하는 데도 상당한 공헌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장계가 올라간 뒤 얼마 후인 1594년 8월 29일 순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병장 성응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전란이 끝나기도 전에 성응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당시 연해 지역 수군진 가운데 만연되었던 전염병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