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5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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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潤輔 |
영어공식명칭 | Sin Yun-bo |
영어음역 | Sin Yun-bo |
영어공식명칭 | Sin Yun-bo |
이칭/별칭 | 비경(斐卿),오림정(五林亭)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욱 |
[정의]
조선 전기 순천 지역에서 세거한 고령신씨 입향조이자 문관.
[가계]
신윤보(申潤輔)[1483~1558]의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고령신씨 순천 지역 입향조이다. 신윤보의 자는 비경(斐卿)이며, 호는 오림정(五林亭)이다. 고령군(高靈君)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신성용(申成用)의 후손이고, 고려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고 조선조에 들어선 광주(光州)에 은거한 서화가 순은공(醇隱公) 신덕린(申德隣)의 5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감찰(監察) 신제(申梯)이고, 할아버지는 신제의 4남 중 2자로 인천부사(仁川府使)를 지낸 신자강(申子杠)이다. 아버지는 신자강의 4남 중 막내아들인 참봉(參奉) 신질(申礩)이고, 어머니는 개성왕씨(開城王氏)이다. 부인은 장흥군(長興君) 마천목(馬天牧)[1358~1431]의 현손녀 장흥마씨(長興馬氏)와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다. 신윤보는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 장흥마씨와의 사이에서 맏아들 찰방(察訪) 신류(申瀏)가 태어났으며, 합천이씨와의 사이에서 참봉(參奉) 신식(申湜)[1551~1623]·만호(萬戶) 신제(申濟)가 있다.
[활동 사항]
신윤보는 1470년(성종 1) 문과에 급제한 이후 1495년(성종 25)에 이르기까지 단양(丹陽)·임천(林川)·연안(延安)의 도호부사(都護府使), 원주(原州)·해주(海州)의 목사(牧使)를 지냈다. 이후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모면하기 위해 검천산이 있는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도사동(道沙洞)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신윤보는 도사동의 동천 강가에 정자를 짓고 정자 주변에 소나무, 매화, 대나무, 복숭아, 유자 등 다섯 종류의 나무를 심은 다음 ‘오림정(五林亭)’으로 현판을 붙이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신윤보는 이후 다시 벼슬에 등용되었으며, 1540년(중종 35) 상서원판관(尙瑞瑞判官)을 지내던 중 사헌부(司憲府)의 보고로 징계되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1540년(중종 35) 1월 19일 세 번째 기사에는 사헌부에서 신윤보에 대하여 “본래 성격이 탐오하고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데 해주판관으로 재직할 때 백성을 수탈하여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등 행동에 거리낌이 없으니 엄히 다스리고 파직시킨 후 다시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고 있으며 중종이 이를 윤허하는 내용이 보인다.
[묘소]
신윤보의 묘소는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간전면(艮田面) 효곡리(孝谷里)에 있으며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1502~1558]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있다.
[상훈과 추모]
오림정이 오랜 세월이 흘러 퇴락하자 1900년대 초에 신윤보의 후손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강남악부(江南樂府)』 오림사에 그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