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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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潤 |
영어공식명칭 | Jang Yun |
영어음역 | Jang Yun |
영어공식명칭 | Jang Yun |
이칭/별칭 | 명보(明甫),충의(忠毅)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욱 |
출생 시기/일시 | 1552년 - 장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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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장윤 식년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3년 - 장윤 수군만호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593년 - 장윤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93년 - 장윤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추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5년 - 장윤 선무원종 3등공신 책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59년 - 장윤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으로 증직 |
부임|활동지 | 장윤 부임지 - 전라남도 순천시 |
묘소|단소 | 장윤 묘소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월계리 |
사당|배향지 | 창렬사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본성동 415] 진주성 |
사당|배향지 | 정충사 - 전라남도 순천시 저전동 |
성격 | 무관|의병 |
성별 | 남 |
본관 | 목천 |
대표 관직 | 수군만호 |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 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장윤(張潤)[1552~1593]의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명보(明甫). 아버지는 장응익(張應翼)이다.
[활동 사항]
장윤은 31세인 1582년(선조 15) 봄에 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장윤이 처음으로 관로에 오른 것은 1583년 전라좌수영 관내의 발포진 수군만호였다. 그러나 1년 만에 수사와의 불화로 인해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장윤은 의병 삼백을 모아 읍성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내지의 읍성 방위보다는 북부 산간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문과 출신의 의병장 임계영(任啟英)이 이끌던 전라좌의병 부대에 가세하였다. 처음 전라좌의병이 성군 하는 과정에서 우려했던 문제가 고령의 문신 출신 의병장이 군사를 통솔하였다는 점인데, 무관 출신의 장윤이 합세하면서 의병조직이 강화되었다. 의병부장으로 합세한 장윤은 전라좌의병의 선봉장으로서 정예군을 이끌고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성주 개령 지역에서 벌어진 수복 전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1592년(선조 25) 12월 14일, 장윤이 이끈 전라좌의병 정예군이 일본군을 성 밖으로 유인하여 섬멸함으로써 적의 근거지가 되어왔던 성주성이 사실상 이때 탈환되었다. 이날의 전투는 사전에 현지의 관군과 의병의 합동작전을 구상하였으나, 전라좌의병 외엔 아무도 참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라좌의병만이 싸워서 10여 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일본군의 병력은 확인되지 않으나 약 3분의 2 가량을 사살하였다고 한다. 1593년 6월에 있었던 2차 진주성전투에서 장윤은 수성전에 참전하였다. 21일부터 29일까지 9주야에 걸친 공방전에서 장윤은 충청병사 황진(黃進)[1550~1593]과 더불어 선봉에서 수성전을 지휘하였다. 전투 기간에 장윤은 서예원(徐禮元)[?~1593]을 대신하여 비상시 목사직을 수행하였고, 황진이 전사한 뒤에는 진주성 최후의 수성대장으로서 분전하였으나 29일 전사하였다.
[묘소]
장윤의 묘소와 묘비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월계리에 있다. 묘소는 석물[상석, 망주석은 고식이고 장명석, 석인상, 상석, 비석 등 일부는 신재]을 갖추고 있다. 구 묘갈은 이제가 지었고 비문 글씨는 김만주가 썼으며 전서는 증손자인 장성한(張成漢)[1644~?]이 썼다. 이 비 옆에 새로 세운 비[갑자년, 1984년]가 함께 있다. 주변에 의령남씨 남경운(南景雲)의 묘가 함께 있다.
[상훈과 추모]
1593년(선조 26) 8월 7일 진주성 수성전에서 전사한 6인의 순절에 대한 추증교지가 내려졌는데, 이때 장윤에게는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추증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선조 40) 7월 진주에 창렬사[문화재자료 제5호]를 세워 장윤을 포함한 28인의 신위를 제향하였다. 이후 1683년(숙종 9) 순천에 정충사[전라남도 기념물 제232호]를 세운 뒤 사액이 내려졌다. 1718년(숙종 44)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1761년(영조 37)에 ‘충의(忠毅)’ 증시, 1785년(정조 9) ‘부조지전(不祧之典)’의 특전이 차례로 이어졌다. 1859년(철종 10)에는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으로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