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2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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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順天-豪族-朴英規-金摠 |
영어공식명칭 | Park Young Kyu and Kim Chong |
영어음역 | Park Young Kyu and Kim Chong |
영어공식명칭 | Park Young Kyu and Kim Chong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이순엽 |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에 활동한 순천 출신의 호족이자 순천 지역의 수호신.
[개설]
전라남도 순천 지역은 한반도 남해 연안의 해상교통 요지였다. 물산이 풍부한 섬진강 수계의 주요 거점으로서 내륙 수운을 통하여 전라남도의 보성군·곡성군·구례군까지 직접 연결되고, 남쪽이 바다와 바로 연결되어 해상활동을 전개하는 데 매우 적합한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고려 초 해룡산에는 ‘해룡창(海龍倉)’이라는 조창(漕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해룡창은 사비포(沙飛浦)에 위치하였는데, 992년(성종 11) 조양포(潮陽浦)로 명칭이 바뀌었다. 조양포는 현재의 전라남도 순천시 홍내동의 망월산[해룡산] 인근에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에 ‘해창(海倉)’이 설치되었는데, 이 해창은 현재의 순천시 해룡면 해창리의 해안 지역이다. 해창이 있던 포구는 세곡(稅穀)을 운송하는 곳이었다. 이처럼 고려 초부터 조선 시대까지 순천시의 남부해안지대, 즉 순천만은 해상운송 혹은 해상교통의 주요한 근거지였다.
우선 순천 지역과 연관된 역사적 인물은 견훤(甄萱)을 꼽을 수 있다. 견훤은 신라의 중앙군으로 경주에서 근무하다가 서남해의 방수군(防戍軍)이 되었다. 견훤은 휘하에 상당한 수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러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892년(진성여왕 6) 무주에서 자립하여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하였다. 이때 순천 지역은 견훤 정권의 핵심적인 세력 기반이었다. 견훤이 방수군(防戍軍)으로 근무하였던 순천은 신라에 반기(叛旗)를 들고 거병하였던 지역이며, 거병 이후에 처음 장악하였던 군현들의 중심이었다. 이에 순천 지역을 견훤정권의 초기 세력 기반이자 모태였다고 규정할 수 있다. 특히 그 세력 기반의 중심에 박영규(朴英規)와 김총(金惣)이 있었다.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인 박영규와 김총은 견훤의 핵심적인 측근 인물로서 견훤정권의 유력한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해룡산신이 된 박영규]
박영규는 신라 말 고려 초 순천 일원을 근거로 해상활동에 종사하면서 성장한 해상 세력 출신의 호족이다. 박영규는 대략 870년대 중·후반 무렵 태어났다.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순천의 토착 세력 출신인 박영규는 왕경인과 구별되는 지방인으로서 골품제에서조차 제외되는 낮은 신분이었다. 신라 말 고려 초를 맞이하여 해룡산 아래 조양포 일원을 근거로 삼아 활동하면서 해상세력을 장악하여 해상무역의 이익을 차지함으로써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박영규는 순천 지역의 유력한 대호족(大豪族)으로 성장하였고, 순천 지역의 군장(君長)으로 군림한 인물이다. 박영규가 해상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해룡산 일원에는 해룡산성이 있다. 해룡산성은 해발 54~76m의 구릉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낮은 야산에 축조된, 방형에 가까운 토성이다. 해룡산성은 대략 삼국시대나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조사에 따르면 산성은 처음 축조된 이후 대대적인 보수·증축을 거쳤다고 한다. 해룡산성의 보수·증축은 박영규에 의해 신라 말 고려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영규와 그 부조(父祖)는 견훤의 방수군 시절부터 연고를 맺은 사이였다. 그리하여 견훤의 거병에 가담하는 것은 물론 전라남도 동부 지역 호족의 호응과 협조를 유도함으로써 견훤의 자립과 후백제 창업에 이바지하였다. 박영규는 견훤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견훤의 주요한 정치세력이 되었으며, 순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즉 견훤의 사위이자 후백제의 장군인 박영규는 정권의 유력자로서 후백제의 군사적 팽창과 해상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후백제가 군사 활동을 펼치고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하는 문제에서 박영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가진 자였다. 박영규와 혼인을 통하여 연합한 견훤의 의도는 정권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견훤은 박영규와 연합함으로써 무주 동남 지역을 후백제의 확고한 영역으로 확보하고자 하였고, 전라남도 나주 지역 호족의 이반에 따른 서남해 일대의 취약성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박영규는 936년(태조 19) 신검(神劍)의 정변(政變)에 반발하여 고려에 귀부(歸附)하였다. 박영규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우리 임금을 버리고 적자를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를 볼 수 있으리오”라고 말했다. 당시 호족들은 자신의 지배영역을 보존하고 그 영역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서 유력한 지배자에게 귀부하였다. 박영규도 순천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왕건에게 귀부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박영규가 고려에 귀부한 것은 견훤의 귀부와 함께 후백제의 멸망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귀부 후 박영규와 박영규의 두 아들은 개경에 거주하면서 중앙의 관료체제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박영규 가문은 고려 초 중앙정계에서 상당한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박영규는 세 딸을 각각 왕건의 부인[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정종의 왕후[문공왕후(文恭王后)·문성왕후(文成王后)]로 납비(納妃)하였다. 박영규를 향한 왕건의 극진한 예우는 전라남도 지역의 동남부 일원에 대한 고려 왕실의 영향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순천의 경우처럼 끝까지 견훤의 편에 속하였던 옛 후백제 지역 주민들의 고려에 대한 반감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이렇게 왕실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박영규 가문의 정치적 지위는 매우 높아졌다. 이후 박영규 가문은 호족에 대한 광종의 대대적인 숙청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박영규는 후백제시대와 고려 초기에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다졌으며, 아울러 본거지였던 순천 지역에 대한 장악력도 더욱 높여서 사후(死後)에는 순천 지역의 해룡산신으로 추앙받았다. 박영규가 순천 해룡산의 산신이 된 경위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으나, 그 시기는 대략 현종 대[1009-1031]로 알려져 있다. 거란의 제2차 침입 당시 나주가 왕실 보위에 기여한 사실을 높이 평가한 현종은 나주를 크게 우대하였다. 반면에 순천은 읍격(邑格)이 하강하고 관할 영역이 줄어드는 등 상대적으로 위축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순천의 토착 유력자들은 박영규를 해룡산신으로 추앙함으로써 그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박영규를 앞세워 순천 역시 나주 못지 않게 고려왕조에 기여하였음을 널리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순천 또한 나주와 마찬가지로 우대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순천 지역 주민들이 박영규를 해룡산신으로 받들어서 해룡산사에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것은 박영규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이 순천의 수호신으로 신앙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이는 순천 지역 주민들을 정신적으로 결집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된다.
[성황신이 된 김총]
김총은 여수반도를 무대로 활동하던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으로 영취산(靈鷲山) 인근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문헌에 따르면 김총은 통일신라 헌안왕(憲安王)[857~861] 때 여수 지역의 진례산 아래 적량에다 치소를 차려 당시 남해안에서 날뛰는 적들을 정벌하고 선정을 베풀고, 그 공으로 순천 지역을 다스리는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진례산은 옛 진례부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진례부곡은 현재의 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동의 진북·진남 마을에 있었다. 이에 진례산은 진북·진남 마을 인근 산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진례산이 흥국사·영취산 인근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진례산은 현재의 영취산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으며, 김총은 영취산 인근의 어느 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하고 활동한 인물일 것이다.
김총이 성장하고 활동했던 여수 지역은 순천시, 고흥반도, 남해도와 인접해 있고, 섬진강의 수운을 이용해 내륙으로 연결되는 지역으로서 해상교통·해상무역 등의 해상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김총은 여수 지역에서 해상활동에 종사하던 중 견훤에게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인가별감(引駕別監)이라는 관직에 있으면서 견훤의 핵심적인 측근 인물로 활약하였다. 김총은 순천만과 광양만 일대에서 군사 활동을 하던 견훤의 휘하로 견훤과 동고동락하던 방수군(防戍軍) 출신이었다.
김총은 견훤이 봉기하던 초기 순천을 비롯한 전라남도 동부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끌어냄으로써, 견훤이 무주를 점령하고 새로운 왕조를 창업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였다. 나아가 견훤의 핵심 측근으로서, 후백제 정권이 전주 지역을 아우르고 공주에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물론 김총이 견훤의 인가별감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김총의 활동이 어떠했다고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김총은 견훤의 초기 핵심병력이었던 방수군 출신의 군인이었기 때문에 견훤정권이 성립된 후에도 계속 견훤에게 충성하면서 중요한 군사적인 임무를 띠고 활약하였다. 후백제왕 견훤을 섬기는 데 일생을 바친 김총은 후백제인(後百濟人)으로 살다 후백제인으로 생을 마쳤다. 이러한 김총은 순천김씨의 시조이다. 고려시대에 순천김씨는 중앙에 진출하여 크게 영달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고 지방에서만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고려 말에 사족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총은 죽은 뒤에 지역의 주민들에 의해 성황신(城隍神)으로 받들어져 성황사(城隍祠)에서 치제(致祭)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란기를 맞아 무장(武將)으로 이름이 있던 조상을 고을의 수호신인 성황신으로 추앙함으로써, 자신들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지역의 수호자임을 자처하고자 하던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진례산에 소재하던 여수현 성황당의 신으로 추앙되었다. 그 시기는 여수현이 속현의 굴레에서 벗어나던 1350년(충정왕 2)을 전후한 즈음이었다. 그 후 1409년(태종 9) 무렵 여수현이 순천도호부의 직할지로 편입되면서 순천도호부의 성황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縣)이 사라지고 치소(治所)가 순천 지역으로 옮겨가는 데 대한 여수 지역의 불만을 완화하고자 진례산의 옛 여수현 성황당을 공식적인 관제(官祭)를 받는 순천도호부의 성황제로 삼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관아로부터 제정(祭亭)을 받았다. 순천의 군장(君長)은 아니었지만, 영웅적인 인물이었다며 칭송하고 있다.
김총의 묘와 김총을 제향하는 사당인 동원재(同源齋)가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에 있다. 동원재에는 1988년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성황신김총영정이 모셔져 있다. 성황신김총영정의 우측 상단에 ‘성황신 김총’이라는 묵서가 쓰여 있고, 갑옷에 투구를 쓴 무장상으로 두 손에 창을 붙들고 있으며, 약간 우향의 검은색 의자에 앉은 전신상으로 정통 초상화법을 따르고 있다. 얼굴의 표현은 눈을 둥그렇게 부릅뜬 눈, 큰 코에 성근 수염의 과장된 표현으로 불화기법을 사용하여 불교의 사천왕상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성황신상은 민간 무속신앙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박영규와 김총은 전라남도 순천시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순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후백제 견훤과 연결을 맺고 활동한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자 견훤의 핵심적인 측근 인물로서 견훤정권의 유력한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박영규는 견훤의 뒤를 이어 고려에 귀부하여 고려 초에 정치적으로 출세하였던 인물이었고, 김총은 후백제와 운명을 함께 한 후백제의 인물이었다. 특히 박영규는 삼중대광(三重大匡)의 벼슬에 올랐으며, 박영규를 제외하면 고려 전기에 중앙으로 진출한 순천 지역 출신의 인물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박영규의 후손들은 순천 지역에 세거하며 향리로서 살았고, 몽골 침입 때 박난봉의 활약이 계기가 되어 박난봉을 인제산신으로 모시고 그 제사를 주관하면서 순천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의의와 평가]
순천 지역의 주민들은 해룡산신인 박영규와 함께 김총을 성황신으로 모셔 정신적으로 결집했다. 이것은 순천 지역의 산신과 성황신이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로 인격신화(人格神化)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당시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는 물론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박영규계의 순천박씨와 김총계의 순천김씨로 대표되는 지역 토착 세력이 지방사회에서 역동적인 모습을 펼친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