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말·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 운동. 외세의 조선 침탈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비롯된 반제 자주화 투쟁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한 항일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항일 독립 운동은 강제 병합 이전의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 등 양대 흐름으로 전개되었고, 병합 이후에는 새로운 독립 운동의 이념 수용에 따른 민족 대 사회주의의 양대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
한말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 경상북도 의성 출신 또는 의성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의성 지역 한말 의병 활동은 을미사변을 계기로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에서 가장 먼저 전개되었다. 의병 부대는 의병장 김상종(金象鍾), 초모장 김수욱(金壽旭), 중군 권대직(權大稷), 선봉장 김수빙(金壽聘), 관향장 김수협(金壽莢)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노수(朴魯洙)[1907~?]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출신으로, 1920년대 서울에서 공학회(共學會)·서울 학생 구락부·경성 청년회, 그리고 일본에서 신간회 동경 지회 등에 가입하여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8월 30일 의성군의 옥산면·점곡면·단촌면 청년 박명옥(朴明玉)·유시언(柳時彦)·김성윤(金成允) 등과 함께 의성 지역의...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 1919년 3월 12일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 교회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한 목사 박영화(朴永和)의 장남이다. 박상동(朴尙東)[1894~1948]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8일 대구 계성 학교(啓聖學校) 재학 중 대구 서문 시장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1...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석홍(朴錫洪)[1896~1985]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에서 출신으로,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아성현(阿城縣)에서 강화인(姜化仁)·박삼근(朴三根) 등과 함께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한 뒤 선전 부장이 되어 잡지 『농군(農軍)』을 발간하면서 목단강(牧丹江) 일대의 재만 동포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세길(朴世吉)[1876~1946]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이 주도한 비안면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에 참가하였다. 3월 12일 박영화는 동료들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시목(朴時穆)[1894~1945)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1919년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감찰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로 돌아왔다.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2월 신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달(朴永達)[1887~1962]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과 함께 비안면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영달은 박영화·박영신·배중엽·배달근 등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신(朴永新)[1891~1942]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쌍계동 쌍계 교회의 목사 박영화(朴永和)의 동생으로 쌍계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위한 구체적 계획에 참여하였다. 박영신은 3월 12일 자신의 집에서 형 박영화를 비롯하여 박영달·배중엽·배달근 등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2일 오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화(朴永和)[1859~1923]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쌍계 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으면서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동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7일 평양 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재화(朴在華)[1890~1928]는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대리리 출신으로, 1922년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소재 독립군 단체 흥업단(興業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에서 윤세복(尹世復)·김혁(金爀)·김호(金虎) 등의 주도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흥업단의 표면적인 목적은 산업 진흥...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달근(裵達根)[1865~1944]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배달근은 박영화·김원휘·박영신(朴永新)·박영달(朴永達)·배중엽(裵重曄) 등과 함께 3월 13일 쌍계동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킨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3월 12일 박영화·박영신·박영...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도근(裵道根)[1866~1923]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정오 무렵 학생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동민들은 함께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박영화·박영신·박영달·배달근·배중엽 등이 만든 200장 정...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용도(裵容度)[1895~1971]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영화(朴永和)·김원휘·박영신(朴永新) 등은 3월 13일 쌍계동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킨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배용도를 비롯한 배도근·배용석·이일만·김명출·박세길 등이 합세하였다. 배용도는...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용석(裵容奭)[1890~1938]은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이 주도한 비안면 쌍계동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박영화는 교인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위하여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이날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마을로 돌아오자 교인들과 동민들은 만세...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중엽(裵重曄)[1882~1934]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과 함께 비안면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배중엽은 박영화(朴永和)·김원휘·박영신(朴永新)·박영달(朴永達) 등과 함께 3월 13일 쌍계동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킨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기수(吳麒洙)[1892~1959]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 출신으로, 1912년 경성 관립 공업 전습소(京城官立工業傳習所)를 졸업하고 임시 토지 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기수(旗手)로 근무하다가 의성 경찰서 순사보(巡査補)로 근무하였다. 1919년 5월 만주로 가서 조선 독립단(朝鮮獨立團)에 가입하고 귀향하여 1919년 음력 9월 경 경...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병수(吳丙洙)[1905~1938)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출신으로, 1932년 10월 10일 의성군 의성면 도서동에서 오기수(吳麒洙)·김규복(金圭福)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한 지도 기관으로 의성 적색 독서회(義城赤色讀書會)를 조직하였다. 오병수는 청년부 책임자를 맡았고 의성 체육회(義城體育會)를 장악하는...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진문(吳進文)[1896~195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상리리 출신으로, 1919년 8월부터 대구에서 오기수(吳麒洙) 등과 함께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폭살 계획을 수립하고 활동하였다. 그는 1920년 1월 의성 출신 오기수와 김영우 등과 함께 조선규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740원을 제공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
1930년대 전반기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통해 독립을 모색한 비밀 결사. 의성 적색 독서회는 1931년 세계 대공황과 일본 경제 악화에 따른 식민지 지배 통치가 더욱 강화되는 정세 속에서 의성 지역을 단위로 한 사회주의적 비밀 결사이다. 의성군청의 공무원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의성 적색 독서회는 1931년 무렵 의성으로 들어온...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봉수(李鳳壽)[1878~1919]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안평면 대사동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이봉수는 이북술(李北述)의 권유를 받고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은 안평면 마전동·기도동·괴산동을 돌면서 400여...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 이북술(李北述)[1887~1970]은 이화실(李華實)·이호출(李浩出)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李鍾出)을 비롯한 교인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양준(李良俊)[1890~1921]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李鍾出)을 비롯한 교인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대사동 교회의 이종출은 3월 12일 비안면 쌍계 교회의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시위 계획을 세웠다. 이양준은 3...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일만(李一萬)[1903~1954]은 이종연(李鍾淵)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이 주도한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 학교(比安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정오 무렵 마을로 돌아와...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종출(李鍾出)[1890~1966]은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이양준(李良俊) 등과 교회에 남아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당일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
-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역사. 조선 총독부는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의 행정 부처와 사법부를 두고, 지방은 도(道)·부(府)·군(郡)·면(面)의 행정 체계를 갖추었고, 총독은 일본 일왕에 직속되어 총리 대신을 거쳐 일왕에 상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사회적·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재호(林在虎)[1898~1961]는 1919년 3월 12일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과 의성군 쌍계동의 박영화 등이 주도한 독립 만세 운동의 소식을 듣고 동부동과 서부동의 김석근(金石根)·박홍섭(朴洪燮)·박후도(朴後度) 등의 청년들과 함께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만세 시위에 발맞추어 함께 궐기할 것을 다짐하고 먼저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
-
1920년대 무정부주의 운동의 대표적 항일 운동 비밀 결사에 의성 지역 인사가 연루된 사건. 192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에서는 새로운 사상인 무정부주의가 의성 지역을 비롯한 각 지역에 파급되었다. 이를 계기로 진우 연맹 사건이 발생하여 의성군의 무정부주의자인 박석홍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무정부주의 운동은 모든 제도화된 정치 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
우리 민족은 개항 이래 근대를 달성하기 위한 자구적 노력을 경주하면서 외세의 침탈을 막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강제적 을사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실질적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제의 한국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일제의 한국 지배에 맞서 국내외에서 적극적·...
-
의성 출신의 권상두가 포함된 유림 세력이 1919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조선의 독립 승인 청구권을 제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 1919년 3·1 운동 이후 유림 세력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중 유림이 빠져 있다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질서를 다루는 목적으로 개최된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조선 유림이 대표가 되어 ‘조선 독립 승...
-
1895년~1911년 사이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의병 운동은 집권층이 부패하고 무능한 상태에서 외세가 침략하여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어난 구국 운동의 대표적 형태였다. 의병 운동은 일제의 대한 제국 병합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
-
만주 길림성 무송현(撫松縣)에 있는 군정서(軍政署) 부속 흥업단(興業團)의 의성 지역 군자금 모집 활동. 1920년대 초 만주 길림성 무송현에 있는 군정서 부속 흥업단은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웠다. 1920년 11월 흥업단의 단장 김호(金虎)와 외교 부장 김성규(金星奎)는 이만준(李萬俊)에게 20만 원의 자금 조달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만준은 환인현(桓仁縣)의 한교공회장(韓僑公會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