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구성집(具聖執)[1876~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덕천리 출신으로, 1906년 9월 12일경 김동산(金東山) 의진의 일원으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경상북도 봉화군·강원도 삼척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으는 일을 맡았고, 9월 25일경에는 삼척군 개산동의 윤천총(尹千總)과 이학서(李學瑞)로부터 군자금을 모았다. 1907년 7월경에는 성익현(成益賢) 의...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사연(權士淵)[1881~1925]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출신으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당시 석탑 교회 교인으로서 대사동 시위에 참여하였다. 대사동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 시위는 3월 15일부터 3월 19일까지 진행되었다. 권사연은 3월 17일 이종출(李鍾出)·이양준(李良俊)·김옥돈(金玉頓)·이만준(李萬俊) 등 150여...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상두(權相斗)[1870~1936]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출신으로, 안동 권씨 부정공파 와룡 감애[안동]가의 제일 큰집 출신이다. 3·1 운동 때 유림측에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을 할 때,134명 유림 대표와 함께 서명하였다. 권상두가 살고 있던 단밀면은 원래 상주에 속해 있다가 1895년 비안군으로 편입되었다. 단밀면은 지리...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중수(權重秀)[1869~1980]는 경상북도 의성군 산운면 학미리 출신으로, 권중권(權重權), 권성우(權聖佑)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15년에 결성된 대한 광복회(大韓光復會)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1910년대 무단통치 하에서는 독립운동은 지하화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 광복회는 풍기 광복단(豊基光復團)[대한 광복단이라고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군석(金郡石)[1890~1967]은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구련리 출신으로, 조문면에서의 3·1 운동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조문면의 시위는 대리동 교회 영수인 박낙현(朴洛鉉)과 같은 교회 집사 윤용구와 교인 윤영주·오상룡 등이 3월 18일 의성 장날 장터에서 시위할 것을 결의하여 시작되었다. 4명은 동지 규합에 나서 같은 교회의 김자룡·신...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길도(金吉道)[1878~1924]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안평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안평면 시위는 3월 15일부터 19일까지는 안평면 대사동 교회를 중심으로 전면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15일, 16일 시위대는 밤 8시경 마을 앞에 있는 밭에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곧 시위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네...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도식(金道式)[1889~1923]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박곡리 출신으로, 의성군에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안평면 대사동에서 3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고 그 다음날인 3월 19일에는 4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도리원 장터로 시위 행진한 다음 도리원 주...
-
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김반석(金盤石)[1879~?]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사미리 출신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거의한 박연백(朴淵伯) 의병장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박연백은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과 사곡면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공산(孔山)에서 의병 부대를 결성하였다. 김반석은 의성·영흥·영천·청송 등지로 옮겨 다니며 야간 기습과 화공을 펼쳐 일본군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봉수(金奉洙)[1900~1973]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하령리 출신으로, 안평면에서 3월 15일부터 19일 사이에 벌어진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김봉수는 17일 안평면 하령동에서 동리 청년들과 함께 군중을 규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1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연창하면서 안평면 삼춘동까지 행진하였다. 19일에도 만...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부문(金富文)[1887~1952]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된 점곡면 만세 시위는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김씨 청년들이 시위를 확산시켜 나갔다. 여기에 윤암동의 영양 남씨, 송내동의...
-
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장. 호(號)는 운산.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생원 김수익(金壽翼)이고, 어머니는 한산인 이덕(李悳)의 딸이다. 부인은 도사 이만기(李晩起)의 딸인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다. 김회종은 동생이다. 김상종[1847~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출신으로, 안동 의병 주역인 정재학파 문인인 김흥락과 김도화의 문인이었다....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 운동가. 김성수(金成守)[1890~1965]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서부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6일 비안면 동부동·서부동 주민들에 의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의성군에서 벌어진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는 3월 12일 비안면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과 쌍계동의 만세 시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부동에 사는 김석근은...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옥돈(金玉頓)[1889~1975]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의성군에서 3월 15일에서 19일까지 가장 대규모로 전개된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11~12일 경 그는 이화실의 집에서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3월 15일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후 대사동 교회 영수 이종출과...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원휘(金原輝)[1884~1949]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비안면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김원휘는 안평면 괴산동 괴산 교회 조사(助事)로서, 평양 신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마침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렬한 만세 시위를 목격하였다. 그는 시위로 인해 학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고 3월 4일 평...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일석(金日錫)[1891~1969]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마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9일 의성군 안평면 대사동 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도리원 장날의 시위를 선두에서 이끌었다. 3월 19일 김일석을 비롯 권사연·김유식·이봉수·김치명 등은 도리원 장날을 이용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시위 군중들에 앞장 서 시위를 전개하였...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자룡(金子龍)[1893~1954]은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구련리 출신으로, 의성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8일 조문면 대리동 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주도하였다. 대리동 교회 영수인 박낙현(朴洛鉉)은 1919년 3월에 대구 성경 학당에 갔다가 전국적인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급히 귀향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재범(金在範)[1900~1931]은 김재범(金載範)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화전리 출신으로, 1919년 대구 계성 학교(啓聖學校) 3학년에 재학 중 대구에서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계성 학교의 교사이던 백남채(白南採)·최상원·권의윤·최경학(崔敬學) 등은 학생 대표들인 김재범(金在範)을 비롯, 심...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차쇠(金且釗)[1899~1920]는 경상북도 의성군 신평면 덕곡리 출신으로, 의성군 신평면 3·1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의성 지역에서 전개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는 3월 19일을 고비로 점차 수그러들었다가 3월 25일 신평면 덕봉 교회 교인이 마지막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덕봉 교회 교인 김수성과 이학술 두 명이 만세 시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천특(金千特)[1888~194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출신으로, 의성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의성면의 시위는 조문면 대리동 교회 교인들 중심으로 영수인 박낙현(朴洛鉉)이 1919년 3월에 대구 성경 학당에 갔다가 거기서 전국적인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장터에서 만세 부를 것을 결의하였다.이들은 동지 규합에...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충한(金忠漢)[1883~1965]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 출신으로, 김천 황금동 교회 조사였다. 3월 9일 김천에 있는 황금동 교회에서 평소 동향인으로 알고 지내던 김원휘, 대구에서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김천으로 온 계성 학교 학생 김수길, 황금동 교회의 원로인 최용수, 교회 조수 한명수...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치근(金致根)[1878~1933]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박곡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7일과 19일 안평면과 봉양면 도리원 장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17일에는 시위 군중이 대사동 우리곡(尤利谷) 마을에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후 창길동(倉吉洞)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행진하며 만세 시...
-
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의성. 자는 계삼(季三). 호는 해운당(海雲堂). 본명은 김길주(金吉周)이다. 아버지 김운휘(金運輝)와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李氏)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하락(金河洛)[1856~1896]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교촌리 출신으로, 어릴 때 황학산에서 공부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수학했는지 그 학통이 불분명하다....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호문(金好文)[1887~1942]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송내동 교회 교인이자 김해 김씨 일족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부친 김수배와 함께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희문(金喜文)[1889~1970]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사촌동의 안동 김씨 청년들이 시위를 확산시켰으며, 윤암동의 영양 남씨, 송...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남규우(南圭佑)[1889~1967]는 남오대(南梧大)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된 점곡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만세 시위는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처음 송내동 교회 권수백 조사 등 교인들이 시위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양.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의 후예이다. 남승순(南勝淳)[1857~1925]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9일 점곡면 사촌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점곡면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장남 남규우(南圭佑)·황금종(黃金鍾)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낙현(朴洛鉉)[1887~1957]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의성읍 장날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낙현은 조문면 대리동 교회의 목사로 대구 성경 학당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에 갔다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독립 만세 운동의 소식과 대구에서 일어나고 있던 만세 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귀향하...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수석(朴秀碩)[1884~1944]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 출신으로, 금오리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춘산면 금오동에서 15명의 마을 사람들이 방오발(方五發)의 집에서 마을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신병섭, 신종환과 함께 만세 시위 실행을 결의하고 거사일을 4월 3일로 계획하였다. 박수석은 4월 2일 신종환과...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수영(朴秀永)[1893~1969]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대사 교회의 영수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3월 16일 이북술 등 1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기도동(...
-
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 본관은 밀양. 박연백(朴淵伯)[1869~1909]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출신으로, 박연백(朴淵白)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의 의병 항쟁사 중·후기에 속하는 시기에 의성 의진을 이끈 인물이다. 박연백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의성군 춘산면과 사곡면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공산...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달(朴永達)[1887~1962]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과 함께 비안면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영달은 박영화·박영신·배중엽·배달근 등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2일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신(朴永新)[1891~1942]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쌍계동 쌍계 교회의 목사 박영화(朴永和)의 동생으로 쌍계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위한 구체적 계획에 참여하였다. 박영신은 3월 12일 자신의 집에서 형 박영화를 비롯하여 박영달·배중엽·배달근 등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12일 오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영화(朴永和)[1859~1923]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쌍계 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으면서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동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7일 평양 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장호(朴章鎬)[1886~1961]는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8일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 등이 대구 서문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3·1 운동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8일 오후 3시 경, 서문 시장에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계성학교·대구 고등 보통학교·신명 여학교·대구 성경 학교 등...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천수(朴千壽)[1897~1947]는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계획에 참가하였다. 3월 18일 밤 9시 사촌동 동민 600~700명이 횃불을 밝히며 만세 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에도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박천수는 김성갑(金聲甲)·김용준(金龍俊)·신주칠(申周七)...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세태(裵世泰)[1890~1943]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동리 주민들과 함께 대사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배세태는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 다음 날에도 오후 8시 주민 100여 명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중엽(裵重曄)[1882~1934]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과 함께 비안면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배중엽은 박영화(朴永和)·김원휘·박영신(朴永新)·박영달(朴永達) 등과 함께 3월 13일 쌍계동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킨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병섭(申炳燮)[1892~1933]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4월 1일 춘산면 금오동에서 15명의 마을 주민들이 방오발(方五發)의 집에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던 중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하는 것은 후일 독립될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7일 이웃 고을 청송군 화목 시장(和睦市場)에서도 운동을 하였...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산축(申山祝)[1907~1939]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개일리 출신으로, 1932년 5월 17일 일본 아이치현[愛知縣]에서 문화 보급회(文化普及會)를 조직하여 한국인 노동자의 권익 보호 활동 및 민족 의식 고양을 위한 계몽 활동 등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38년 12월 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9년 2월 12일 나고야[名古屋]...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종환(申宗煥)[1890~1969]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 출신으로, 금오리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춘산면 금오동에서 15명의 마을 사람들이 방오발(方五發)의 집에서 마을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신병섭, 박수석과 함께 만세 시위 실행을 결의하고 거사일을 4월 3일로 계획하였다. 신종환은 4월 2일 박수석과...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주칠(申周七)[1890~1938]은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9일 점곡면에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점곡면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은 3월 18일 오후 9시 사촌동 오후 11시경 서변동 만세 시위로 이어졌고, 3월 19일에는 다시 사촌동의 만세 시위로 이어졌다. 신주칠은 이때 송...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진수(申震洙)[1885~1946]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초전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8일 의성읍 장날 전개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2일과 13일 대리동 교회 목사 박낙현과 교인 윤영주(尹營柱)·오상룡(吳相龍) 등이 3월 18일 의성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박낙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기수(吳麒洙)[1892~1959]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 출신으로, 1912년 경성 관립 공업 전습소(京城官立工業傳習所)를 졸업하고 임시 토지 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기수(旗手)로 근무하다가 의성 경찰서 순사보(巡査補)로 근무하였다. 1919년 5월 만주로 가서 조선 독립단(朝鮮獨立團)에 가입하고 귀향하여 1919년 음력 9월 경 경...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승필(兪承弼)[1891~1974]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마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6일 이북술[일명 李華實]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전개된 만세 시위 행진에 참여하였으며, 19일에는 도리원 장날을 기해 전개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유승필은 도리원 시위에서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몽둥이와 돌...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영주(尹營柱)[1893~1988]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출신으로, 대구 기독교 성경 학교(基督敎聖經學校)에 재학 중 1919년 3월 8일 대구 시위에 참가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의성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윤영주는 3월 12일 대리동 교회의 신도인 윤용구와 오상룡(吳相龍) 등과 함께 의성읍의 장날인 3월 18일 만세 시위를 하...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용구(尹龍九)[1891~1971)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면 대리리 출신으로, 의성읍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2일과 13일 대리동 교회 목사 박낙현과, 교인 윤영주(尹營柱)·오상룡(吳相龍)과 함께 의성 장날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거행하기로 하고 박낙현·윤영주·오상룡 등과 함께 태극기와 붉은 글씨로 ‘대한국 독립 만세...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만준(李萬俊)[1888~1971]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에서 출신으로, 안평면 대사동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오후 8시경 이양준(李良俊)·권사연(權士淵)·이종출(李鍾出)·김옥돈(金玉頓) 등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안평면 괴산동을 출발하여 창길동(倉吉洞)·화령동(花寧洞) 일대로 시위 행진을 전개하고 자...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맹준(李孟俊)[1897~1948]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대사동 독립 만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이맹준은 대사동의 주민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그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16일 오후 8시에도 100...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배기(李培基)[1892~1974]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출신으로, 안평면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 영수 이종출(李鍾出)과 교인들이 주도하는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16일 이북술 등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 행진을 하...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봉수(李鳳壽)[1878~1919]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안평면 대사동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이봉수는 이북술(李北述)의 권유를 받고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은 안평면 마전동·기도동·괴산동을 돌면서 400여...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 이북술(李北述)[1887~1970]은 이화실(李華實)·이호출(李浩出)이라는 다른 이름도 전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李鍾出)을 비롯한 교인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수원(李守元)[1874~1964]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주민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동참하기로 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16일 오후 8시에도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순근(李順根)[1893~1958]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이양준과 함께 1919년 3월 18일 안평면 대사동에서 3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안평 주재소를 향하여 시위 행진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양준(李良俊)[1890~1921]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에서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 교회의 영수인 이종출(李鍾出)을 비롯한 교인들과 함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대사동 교회의 이종출은 3월 12일 비안면 쌍계 교회의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시위 계획을 세웠다. 이양준은 3...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원춘(李元春)[1871~1936]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15일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동리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소요...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원현(李元鉉)[1926~1945]은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상업 학교 재학 중 1943년 4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尙敎) 등이 앞서 조직했던 항일 학생 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 독립을 위한 비밀 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 항쟁을...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재인(李在寅)[1907~1964]은 의성군 의성읍 출신으로, 1935년 1월경 의성읍 교회 청년을 중심으로 결성된 청년 면려회(靑年勉勵會)를 항일 운동 단체로 조직 개편하였다. 이재인은 의성읍 교회의 목사인 유재기(劉載奇)가 “조선 민족은 현재의 비경(悲境)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일본의 손에서 되돌려 찾아내는 일 외에는 없으며 이 같은...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종순(李鍾珣)[1882~1934]은 의성군 봉양면 사부리 출신 유생(儒生)으로, 1919년 3월 17일부터 18일에 걸쳐 봉양면 사부동에서 전개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종순은 일제의 한국 강점 이래 평소 독립을 희망하고 있던 중 전국 각지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에 동참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종출(李鍾出)[1890~1966]은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이양준(李良俊) 등과 교회에 남아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당일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 운동가. 이태원(李兌遠)[1928~현재]은 1927년 의성군 단촌면에서 출신으로, 2012년 6월 현재 생존하고 있다. 대구 상업 학교 재학 중 1943년 4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尙敎) 등이 앞서 조직했던 항일 학생 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 독립을 위한 비밀 결...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천.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의 후예이다. 이태학(李泰鶴)[1890~1962]은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출신으로, 의성군 운산면에 있는 교회 목사로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가던 도중, 3월 초순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후 대구로 가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도록 권유를 받고, 3월 7일 대구...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흔이(李欣伊)[1879~1940]는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영수 이종출을 비롯한 교인들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자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1...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재호(林在虎)[1898~1961]는 1919년 3월 12일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과 의성군 쌍계동의 박영화 등이 주도한 독립 만세 운동의 소식을 듣고 동부동과 서부동의 김석근(金石根)·박홍섭(朴洪燮)·박후도(朴後度) 등의 청년들과 함께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만세 시위에 발맞추어 함께 궐기할 것을 다짐하고 먼저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내주(張來周)[1902~1928]는 의성군 단북면 이련리에서 태어났다. 1920년 7월 30일 대구에 있는 금구(金龜) 여관에서 김한주(金漢柱)를 만나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니 우국(憂國) 선비들을 모아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 정부와 각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응주(全應珠)[1895~1950]는 1919년 3월 17일 밤 강희석 등과 함께 석탑동 교회를 중심으로 한 주민 50여 명을 이끌고 마을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창길(倉吉)·삼춘(三春)·박곡(朴谷)·석탑(石塔)·신월동(新月)·화령(花寧) 등 부근의 각동에서 운집한 8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갑이(鄭甲伊)[1879~1975]는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영수 이종출을 비롯한 교인들이 교회에 남아서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던 중, 당일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대사동의 주민들과 함께 오후 7시경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경원(崔慶源)[1878~1965]은 의성군 조문면(召文面) 대리동(大里洞) 교회의 목사 박낙현(朴洛鉉) 등과 함께 1919년 3월 18일 의성읍 장날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최경원은 박낙현의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기로 하고, 의성읍 도동 교회[현 의성읍 교회]의 김천특(金千特)도 동참하기로 뜻을 모았다. 최경원은 의성으로 나갔...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달모(崔達模)[1860~1932]는 전응주와 함께 주민 50여 명을 이끌고 마을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후 창길(倉吉)·삼춘(三春)·박곡(朴谷)·석탑(石塔)·신월동(新月)·화령(花寧) 등 부근의 각동에서 운집한 8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고, 이튿날 밤에도 창길동에서 신월동까지 만세 시위를 벌였다...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순권(崔順權)[1889~1961]은 1919년 3월 15일 대사 교회의 영수 이종출을 비롯하여 교인들이 계획한 만세 시위에 찬성하고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16일에는 동민 1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기도동(箕道洞)에서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를 벌인 후 해산하...
-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금종(黃金鍾)[1871~1953]은 의성군 점곡면 사촌동(沙村洞) 만세 시위의 소식을 듣고 남승순(南勝淳)·남규우(南圭佑)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19일 남규우와 함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윤암동을 출발하여 사촌동으로 몰려갔다. 밤 9시 무렵, 사촌동 도로에는 부근 주민 500여 명이 모여 중앙 도로를 오르내리며 태극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