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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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山里趙永吉旌閭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Gate for Jo Young-gil in Bongsan-ri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천호로 96 집 동쪽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봉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려.
[개설]
조영길(趙榮吉)과 조준(趙峻)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되었다. 조준[1573~1635]의 본관은 양주, 자는 사첨, 호는 유호(柳湖)이다. 대제학 조말생(趙末生)의 후손이다. 외할아버지는 덕수이씨 이대남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원주에 있던 영원성도 함락되었는데, 이때 조준은 어머니와 형인 조인[1565~1592]과 함께 숨어 있었다. 일본군이 숨어 있는 곳에 와서 칼을 들고 덤벼들자 조준과 조인 형제는 맨몸으로 가로막았으나, 어머니와 조인은 사망하고 조준만 살아남았다. 1687년(숙종 13)에 정려가 내려지고, 1696년(숙종 22)에 호조정랑에 증직되었다. 조준의 장인은 영월신씨 신눌(辛訥)이다. 아들은 조인후, 조덕후이다. 조영길[1789~1875]의 본관은 양주, 자는 자적이다. 조준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조만빈(趙萬彬)[1753~1802]이다. 외할아버지는 기계유씨이다. 어머니 기계유씨[1754~1793]가 1793년에 돌아가시고, 1802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병환에 온갖 약을 구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자 절체절명의 순간에 새끼손가락을 넣어 3일을 더 살게 했으나, 끝내 돌아가시고 이에 3년간 새벽부터 밤까지 묘를 찾아 울었다고 한다. 조영길의 효심이 알려져 유학자들의 추천장과 승지 김복한의 장계로 고종조에 증직과 함께 정려의 명이 내려졌다.
[위치]
봉산리 조영길 정려는 전주-대전 간 17번 국도로 어우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741번 지방도로를 가다가 봉산마을 버스정류장 못 미쳐 우측 언덕 위에 있다.
[변천]
1946년 5대손 조창희가 주선해 봉산리 조영길 정려를 세웠다.
[형태]
봉산리 조영길 정려 비각은 정면 1칸[200㎝], 측면 1칸[198㎝]의 팔작지붕[사다리꼴의 맞배지붕에 측면에 지붕을 달아낸 형태], 홑처마이다. 비각 안에 2개의 비석이 있다. 우측 비석의 전면(前面)에는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 양주조공휘영길지려(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 楊州趙公諱永吉之閭)’라 쓰여 있다. 우측면에는 기유 9월에 12세손 조창희(趙昌熙)가 글을 썼다고 되어 있다. 이때의 기유년은 1969년이다. 이 비석의 높이는 111㎝, 폭은 43㎝, 두께는 17㎝이다. 좌측 비석의 전면에는 ‘효자증호조정랑 양주조공호유호휘준지려(孝子贈戶曺正郞 楊州趙公號柳湖諱峻之閭)’라 쓰여 있다. 이 비석의 높이는 111㎝, 폭은 43㎝, 두께는 17㎝이다. 비각의 위쪽에는 ‘효자조봉대부증동몽교관 양주조공지려서(孝子朝奉大夫贈童蒙敎官 楊州趙公之閭序)’의 현판이 있다. 현판은 1947년[단기 4280]에 5대손 조창희(趙昌熙)가 서문을 작성했다.
[현황]
봉산리 조영길 정려는 길가 오른쪽 언덕 위에 있으며, 관리는 잘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