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6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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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基敬 |
영어공식명칭 | Lee Gi-gyeong |
이칭/별칭 | 백심(伯心),목산(木山)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호석 |
출생 시기/일시 | 1713년(숙종 39) - 이기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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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38년(영조 14) - 이기경 식년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39년(영조 15) - 이기경 정시 문과 장원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57년(영조 33) - 이기경 9월, 문과 중시에서 장원 |
활동 시기/일시 | 1757년(영조 33) - 이기경 9월, 승정원 승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58(영조 34)~1759년(영조 35) - 이기경 예조참의, 호조참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59년(영조 35) - 이기경 강원감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62년(영조 38) - 이기경 6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됨. 8월, 황해 감사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68년(영조 44) - 이기경 2월, 동래부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69년(영조 45) - 이기경 대사간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71년(영조 47) - 이기경 한성우윤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71년(영조 47) - 이기경 삭탈관직, 남해현의 서민이 됨 |
몰년 시기/일시 | 1787년(정조 11) - 이기경 사망 |
출생지 | 이기경 출생지 - 전라도 전주 |
사당|배향지 | 이기경 배향지 - 전라북도 전주시 남노송동 인봉서원(麟峯書院)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자 |
본관 | 전의(全義) |
대표 관직|경력 |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세거했던 문신.
[가계]
이기경(李基敬)[1713~1787]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백심(伯心), 호는 목산(木山)이다. 이국헌(李國憲)의 증손자이고, 할아버지는 이지억(李祉億), 아버지는 이익열(李翊烈)이며, 어머니는 오대성(吳大成)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기경은 일찍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상신(相臣) 이상진(李尙眞)의 방손으로, 대대로 전라도 전주(全州)에 살았다. 1739년(영조 15)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헌부의 지평, 정언, 장령 등 언관직에서 활동하였다. 1748년(영조 24) 지평으로 있을 때 임금이 특지(特旨)로 관직을 임명한 것을 공격하고, 탕평책을 극력 비판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가 사적(仕籍)에서 삭제되고 해남현[현 해남군]에 정배(定配)되었다. 뒤에 다시 복직되어 사헌부에서 근무하다가, 필선(弼善), 승지(承旨), 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강원감사와 황해감사를 지냈다. 1762년(영조 38)에는 대사간이 되었고, 1769년에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1771년 한성부윤이 되었다가 권응진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삭탈관직을 당하고 남해현[현 남해군]의 서민이 되었다. 1788년(정조 12) 이기경의 사후에야 아들 이덕감(李德鑑)의 상언에 의하여 비로소 복권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기경은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에게 사사하였다. 이기경은 당대의 명필이자 석학이었으며, 외암(巍庵) 이간(李柬)과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종합한 「인물성동이고(人物性同異考)」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이기경의 문집으로 『목산집(木山集)』이 남아 전한다.
[상훈과 추모]
이기경은 전주시 남노송동에 있는 인봉서원(麟峯書院)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인봉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에 복설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