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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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重哲 |
영어공식명칭 | Yu Jung-cheol |
이칭/별칭 | 요한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대길 |
출생 시기/일시 | 1779년(정조 3) - 유중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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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01년(순조 1) 11월 14일[음력 10월 9일] - 유중철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4년 - 유중철 복자품(福者品)에 오름 |
출생지 | 유중철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 |
활동지 | 유중철 활동지 - 전라북도 완주군 |
성격 | 종교인 |
성별 | 남자 |
대표 경력 | 동정 부부 순교자|복자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출신의 종교인.
[개설]
유중철(柳重哲)[1779~1801]은 아버지 유항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생을 동정으로 마칠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같은 뜻을 가진 이순이 루갈다와 동정 부부로 평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고 혼인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 유항검을 비롯하여 동정부부 이순이 그리고 일가족 4명과 함께 순교했다. 2014년 복자품(福者品)에 올랐다.
[활동 사항]
유중철은 동정 부부 순교자(童貞夫婦殉敎者)로 본관은 전주(全州), 이명(異名) 종석이다. 1779년(정조 3) 전주의 초남이[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서 부유한 양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부친 유항검, 모친 신희, 아내 이순이, 동행 유문석 등 순교자 집안이다. 유중철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1784년(정조 8)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아버지 유항검이 입교하면서부터였다. ‘호남의 사도’라 불린 유항검은 입교 후 가족과 친지들에게 전교했고, 유항검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유중철은 일찍 세례를 받았고, 신앙 안에서 성장했다. 유중철은 신앙생활이 깊어지면서 ‘평생을 동정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고, 자신의 결심을 아버지 유항검과 당시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밝혔다. 그리고 2년 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역시 동정으로 평생을 살겠다는 결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풍습에서 이들의 동정 생활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에 주문모 신부는 두 사람의 혼인을 주선했고, 마침내 1797년(정조 21) 가을에 혼사(婚事)가 성사되었다. 1798년 10월 두 사람은 부모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이후 이들은 육체의 본능을 참기 어려울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했다. 1801년(순조 1) 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아버지 유항검을 비롯하여 작은아버지 유관검 등 가족과 함께 전주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9월 중순에는 이순이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 유중철은 22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유중철이 순교하면서 아내이자 누이인 이순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 했다고 한다.
[묘소]
유중철의 묘소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치명자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유중철은 순교 213년이 되던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국을 사목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諡福)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