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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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癸石- |
영어의미역 | Gyeseok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석산리 계석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규봉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석산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유래]
계석마을 당산은 정북을 향하고 있어 옛날부터 양산 지역의 대표적인 당산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이로 인해 마을 이름을 ‘제석(祭釋)’이라고 부르다가, 차츰 변하여 지금의 계석마을이 된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한편 지금의 북방 지역에 돌이 많아 ‘제석’이란 이름도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계석마을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문헌은 없으나, 당산 주위에서 출토된 와편 들을 볼 때 신라 이전부터 주거한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의한 입촌 시기를 보면, 『양산 인물지』에 방익(房翼)이 1542년(중종 27)에 동면 제석동에서 출생하였다고 나와 있다. 본관은 의춘(宜春), 자는 중대(中垈), 호는 회암(回庵), 벼슬은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을 맞아 아들 넷을 데리고 금정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의병 모집에 앞장서니 마을 사람들이 많이 호응하여 공을 세웠다. 전란 후에는 퇴폐한 향풍을 바로잡고 민심을 선도한 공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전인 1550년대에는 김해허씨(金海許氏) 제학공파(提學公派) 16세손 허희룡(許希龍)이 살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금정산 석굴[銀銅窟]에서 이씨·배씨·정씨·손씨·서씨·제씨 등과 피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50년경 강릉유씨(江陵劉氏) 경력공파(經歷公派) 16세손 유호만(劉好晩)이 입촌했다는 기록이 있고, 동래정씨 정호의(鄭好義)의 후손이 1700년대에 석산리에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자연환경]
계석마을은 금정산 최북단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셋바위의 정북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쪽으로 양산시청과 신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을 뒷산에는 선바위가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며 마을을 수호하고 있다.
마을 동쪽의 내송마을을 거쳐 돌아온 내송천이 다방천으로 흘러 마을 앞을 지나면서 다방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서쪽에서 다시 양산천과 합류하여 물금읍과 경계를 이루며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있다. 계석마을의 동쪽에서 북쪽으로 나라의 대동맥인 고속국도 1호선(일명 경부고속국도)가 뻗어 있고, 국도 35호선과 호포역이 지난다. 국도와 경부고속국도, 남해고속국도를 연결하는 남양산IC가 석산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현황]
2007년 12월 31일 현재 총 142가구에 33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신도시화로 농지가 없어지자 점점 도시화되어가고 있다. 논·밭 농사를 짓던 예전과는 달리 토착 주민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회사원·공무원·자영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화원이 있고, 그 옆으로는 약국 등 몇 개의 식당이 있다. 대정아파트 입구에 마을회관이 있다. 마을 끝자락인 극동아파트 뒤쪽에는 강릉유씨 입향조 19세손 유세원(劉世源)을 기리기 위해 1999년에 건립한 재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