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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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普陽 |
영어공식명칭 | Jo Bo-yang |
이칭/별칭 | 인경(仁卿),팔우헌(八友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조보양(趙普陽)[1709~1788]은 문과 급제 후 사헌부감찰, 오위장 등을 지냈다. 영주 지역의 여러 인사와 교유하며 학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조보양의 자는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한양조씨는 기묘사화 이후 청하현감을 지낸 조종(趙琮)[1444~1520]의 처가가 있는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의 사일[지금의 영주시 조암동]에 정착하면서, 영주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보양의 증조할아버지는 조명한(趙鳴漢)[1611~?], 할아버지는 황해도도사를 지낸 조봉징(趙鳳徵)[1657~1716], 아버지는 조원익(趙元益)[1688~1778], 어머니는 이기만(李基晩)의 딸 증 정부인 예안이씨이다.
[활동 사항]
조보양은 1709년(숙종 35) 외가가 있던 안동부 풍산현에서 출생하였다. 1747년(영조 23)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입격하였으며 사헌부감찰을 거쳐 예조좌랑에 올랐으나, 예조참판 정후겸(鄭厚謙)[1749~1776]이 참알할 때 나와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을 매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773년(영조 49)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781년(정조 5)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으나 6일 만에 사직하였다. 이후 병조좌랑에 제수되었지만,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1788년(정조 12)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가자되고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제수받았다. 조보양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을 때 마을 곁에 서실을 짓고 강학을 하자 원근의 유생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영주 지역의 인사들과 교유하며 활발한 학문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오계서원(汚溪書院)[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의 「군자당기(君子堂記)」를 쓰기도 했다.
[학문과 저술]
조보양은 이경익(李景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권상일(權相一)[1679~1759]과 이산두(李山斗)[1680~1772]를 직접 만나 학문에 대한 질정을 받기도 했다. 저서로는 『팔우헌집(八友軒集)』과 천곡서당(泉谷書堂) 교재로 활용한 『골동록(汨童錄)』이 있다.
[묘소]
조보양의 묘소는 예천군 보문면 간방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조보양의 묘지명은 류태좌(柳台佐)[1763~1837]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