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328
한자 -小白山-
영어공식명칭 Old Classical Scholars, They Sing a Sobaeksan Mounta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미숙

[정의]

선비들이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소백산을 오르면서 느낀 감회와 여정 등을 남긴 유산록과 시문

[개설]

영주 지역의 소백산(小白山)은 1987년 우리나라의 열여덟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발 1,439.5m, 면적은 322.011㎢로 지리산·설악산·오대산에 이어 산악형 국립공원 가운데 네 번째로 넓은 명산이다. 소백산은 일찍이 망국의 한을 품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거닐었으며, 고려 때에는 조계종을 창시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9년간 수도하던 곳이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 왕들의 태실(胎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부석사·희방사·비로사·성혈사 등 많은 사찰을 품고 있어, 한국 불교문화의 요람이기도 하다.

또한 소백산 여기저기에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수많은 선현의 자취가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민중들의 발길이 이어지던 유서 깊은 산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특히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는 소백산을 일러 ‘사람을 살리는 산’, 즉 활인산(活人山)이라고 하며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감록(鄭鑑錄)』에서는 ‘여러 산 중에서 소백산이 으뜸이요, 지리산이 다음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풍수지리상으로도 소백산은 중요한 위치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소백산은 예나 지금이나 누구라도 한 번쯤은 오르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 된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철마다 소백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오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한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소백산을 다녀온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소백산에 대한 소회를 품고 있다. 그것은 사진이나 그림으로 남겨지기도 하고, 때로는 글귀로 표현되기도 한다. 굳이 그림이나 글귀가 아니더라도, 소백산이 주는 감동은 가슴 한편에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옛 선비들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소백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이황을 비롯해 많은 선비는 소백산에 대한 소회를 각종 기행문과 시문으로 남겼다.

[이봐!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쟈스라]

소백산은 예로부터 많은 문사(文士)가 즐겨 찾던 곳이었지만 그 당시의 소백산은 혼자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오를 수 있었던 곳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좋은 등산 장비가 있었던 것도,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맹수로 인한 생명의 위협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오랜 세월 소백산에 오르기를 열망하였지만 쉽게 갈 수 있었던 곳은 아니었다. 따라서 소백산을 올라가는 여정과 감회를 유산록과 시문에 남겨놓았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퇴계 이황이다. 이황은 “나는 젊었을 때부터 영천(榮川)과 풍기 사이를 왕래하였다. 그리하여 소백산에 대해서는 머리를 들면 바라보이고 발을 던지면 도착할 수 있었으나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바빠서 오직 꿈속에만 생각하고 정신만 달려갔을 뿐인 지가 지금 40년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드디어 소백산을 오르게 되었다고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서 벅찬 감회를 서술하였다.

또 누군가는 “소백산은 관령지간(關領之間)에 기반을 내리고 웅거하여 그 우뚝한 모습이 마치 큰 덕을 갖춘 군자와 같고, 그 속에 온갖 바위들과 골짜기들이 경승을 이루고 있다. 나는 그 아래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평소 한 번만이라도 이 산을 유람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올라가 본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 당시 소백산에 오르는 것은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혹은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무리를 이루어 갈 수밖에 없었다. 5~6명 혹은 많게는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감흥이 일어날 때는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감정을 주고 받았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소백산영주시 순흥면풍기읍 두 고을 사이에 자리한 영남의 큰 산악이다. 신재 주세붕이 시로 노래하고 퇴계 이황소백산에 올라 구경한 이후로, 숲과 고개·물·바위는 한층 빛을 발하여 한 지방의 빼어난 경치를 마음껏 드날렸다. 이로부터 영남의 선비들은 자주 소백산을 오르곤 했다.

갈천(葛川) 임훈(林薰)은 덕유산 향적봉을 오르고 난 후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에서 사람들이 지리산과 가야산을 치송하면서도 덕유산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덕유산에 대한 기록을 남겨줄 만한 선현을 만나지 못해서 그러한 것이지 산의 경치가 볼만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물건이 제 스스로 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귀하게 된다[物不自貴 因人而貴]”라고 하였다. 굳이 멀리 임훈의 말이 아니어도 우리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에서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라는 구절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소백산에는 주세붕이황 같은 옛 선비들이 소백산 곳곳에 빛깔과 향기를 입혔다.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가지 않고 소백산에서 만난 이름 없는 바위나 돈대에 그의 형상에 알맞은 빛깔과 향기를 주었다. 이황초암사 앞의 백운대를 “이미 주경유(周景遊)[주세붕]가 백운대라고 이름 지었는데, 내 생각에는 이미 백운동과 백운암이 있어 이 이름이 혼동되니 백(白)을 청(靑)이라고 고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면서 청운대(靑雲臺)라고 고쳤다. 그리고 국망봉을 오르다가 산성(山城)을 적성(赤城)으로 고쳐 불렀으며, “산중 사람들이 단지 모양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산대바위[山臺巖]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주경유를 만나지 못하여 전날의 속된 이름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고치지 않을 수 없어 자하대(紫霞臺)로 바꾸었다.”라고 하여 이름을 고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름이 없는 곳은 “자하대 북쪽에 두 봉우리가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색은 하얗고 달리 이름이 없어, 내가 감히 동쪽 것은 백학봉(白鶴峰)이라 이름하고 서쪽 것은 백련봉(白蓮峰)이라 이름하여, 이른바 백설봉(白雪峰)과 함께 모두 백(白)으로 일컬었다.”라고 하면서 새로이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백’ 자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은 이유는 그 실상을 들어서 ‘소백(小白)’이란 이름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하였다.

이황뿐만 아니라 동거(東渠) 송정환(宋鼎鋎)은 중가타암과 하가타암 사이에 있는 못 위로 가로지른 바위가 있는데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른다고 하자 자신이 그 모양새를 취하여 와룡암(臥龍巖)이라고 이름을 지어 붙이기도 했다. 가암(稼巖) 김효규(金浩奎)는 대 아래에는 맑고 차가운 물이 거울처럼 흘러서 사람에게 묵은 먼지를 스스로 씻어내도록 하여 그 마음을 환기해 준다고 하여 성심대(惺心臺)라고 이름을 짓기도 했다.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금계바위 위에 있는 이름 없는 봉우리에 풍락산(豐樂山)이란 이름을 주었다. 그리고 그저 절 앞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희방폭포라 하던 것을 “폭포가 은하가 매달린 듯, 백설이 휘날리는 듯하고, 구슬이 빛나는 듯, 옥이 흩어지는 듯하니 그 모양을 따라 백련폭포(白蓮瀑布)라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그 모양을 따라 이름을 고쳤다. 그러면서 이름을 새로 지을 때는 산령과 수신이 노닐기에 욕됨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 옛 선비들은 마음을 다하여 소백산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그들만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문인이나 학자들 사이에는 산에 오르는 것이 꽤 유행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유산(遊山)이라고 했던 것은 단순히 산으로 놀러 가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수양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산을 오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관이 뛰어난 곳에 이르러서는 산에 오르기 전에 준비해 간 알맞게 익은 술을 서로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였다. 그 자리에서 즉시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감흥에다 주흥(酒興)을 곁들여 시를 짓는 풍류를 곁들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못 물은 용솟음치고, 튀거나 날아올라 흩어지는 물거품들은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모습이 흡사 구슬을 흩어 안개처럼 뿜어내는 것 같다. 옥의 광채처럼 번쩍번쩍 눈이 부시어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걸음을 돌려 시냇물 가운데 바위 위에 앉아 맑은 노래 몇 곡을 부르다”라고 했고, 누군가는 “봉두암 서편에 두 개의 석대(石臺)가 있는데, 위쪽은 광풍대(光風臺)이고, 아래쪽은 제월대(霽月臺)이다. 대에 올라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조릴 만하다”라고 하였다. 즉 소백산을 오른 선비들은 소백산을 곧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풍류를 즐기고 공유했던 하나의 풍류 공간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정경들이 풍류를 아는 멋진 선비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몇 분의 시를 함께 감상하면서 소백산의 풍류를 느껴보자.

1. 서거정(徐居正)[1420~1488], 「풍기소백산(豊基小白山)」, 『사가시집보유(四佳詩集補遺)』

소백산연태백산(小白山連太白山)[소백산은 태백산과 이어져 있는데]

위이백리삽운간(逶迤百里揷雲間)[백리를 굽이쳐서 구름 위로 솟았네]

분명화진동남계(分明畵盡東南界)[분명하게 동남쪽 경계를 갈라놓고]

지설천성귀파간(地設天成鬼破慳)[하늘땅이 만든 비밀 귀신이 깨뜨렸나]

2. 이황, 「자개봉(紫蓋峯)」,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천혐오미진단풍(天嫌吾未趁丹楓)[단풍철에 못 올 것을 하늘이 꺼리어서]

고유산화발만홍(故遺山花發晩紅)[메꽃으로 하여금 늦은 철에 피게 했네]

정사홍교연채막(正似虹橋連綵幕)[마치 홍예다리가 채색 장막으로 잇고]

군선감연무이중(群仙酣宴武夷中)[무이산에 신선 모아 흥겨운 잔치 벌인 듯해라]

이황은 이 시 외에도 6편을 더 지었는데, 「자개봉」은 같은 제목으로 2수나 지었다.

3. 주세붕, 「국망봉소백산(國望峯小白山)」, 『무릉잡고(武陵雜稿)』

국망봉두망경국(國望峯頭望京國)[국망봉 정상에서 도성을 바라보니]

장안부견견룡문(長安不見見龍門)[장안은 안 보이고 용문산만 보이구나]

용문서반오운기(龍門西畔五雲起)[용문산 서편에 오색구름 피어나니]

백발고신쌍루흔(白髮孤臣雙淚痕)[백발의 외로운 신하 두 눈에 눈물 고이네]

4. 김시습(金時習)[1435~1493], 「죽령을 지나며(過竹嶺)」, 『매월당문집(梅月堂文集)』

천층석벽로회반(千層石壁路回盤)[천층 석벽이라 길은 구불구불]

일첩위어일첩난(一疊危於一疊難)[한 구비는 한 구비의 어려움보다 더 위태롭네]

절령노매배일점(絶嶺老梅胚一点)[고개 마루 늙은 매화 한 떨기 꽃피웠는데]

북인유작행화간(北人猶作杏花看)[북쪽 사람들은 그것을 살구꽃으로 본다네]

5. 윤선도(尹善道)[1587~1671], 「죽령길에서(竹嶺道中)」, 『고산유고(孤山遺稿)』

석세증종조령거(昔歲曾從鳥嶺去)[지난날 조령을 지나간 적 있었는데]

금래죽령문전정(今來竹嶺問前程)[지금은 죽령 와서 길을 물어보노라]

여하회피경행처(如何回避經行處)[어찌해야 수도하는 곳을 돌아서 피해 갈까]

괴살명시유차행(愧殺明時有此行)[밝은 날에 이런 행색 부끄럽기 때문일세]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떨꼬!]

옛 선비들은 짚신을 신고 대나무, 혹은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소백산을 올랐지만, 그들 대부분의 유산객(遊山客)이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이기 때문에 자연물을 대할 때 단순하게 경관의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배움과 수양의 기회로 삼았다. 즉 산에 올라 주변 경관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과 수양의 태도를 잊지 않았다. 이황 역시 “사람들 말하길 독서가 유산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讀書人說遊山似], 이제 보니 유산하는 것이 독서와 같네[今見遊山似讀書]”라고 한 것처럼 그들은 단순히 산의 경관만 본 것이 아니었다. 산에 오르는 것을 단순한 여가의 하나로 생각하지 않고 공부와 수행의 과정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어떤 작은 냇물을 왼쪽으로 돌아 고개를 오르니 갑자기 끊어진 돌길이 걸린 것 같아 힘을 다하여 올라도 한 촌 나아가면 한 척 뒤로 물러나는 것이 내가 학문하는 것 같아 또한 깊은 도를 깨달은 듯’하다고 하면서 산을 오르는 힘든 순간에도 자신의 학문을 생각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신재 주세붕 또한 이와 유사한 내용의 시를 남겼다.

구문독서여유산(舊聞讀書如遊山)[책 읽는 것이 유산(遊山)과 같다는 말을 예전에 들었는데]

시신유산독서(始信遊山如讀書)[이제는 유산이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것을 비로소 믿겠다]

유산불기역무익(遊山不記亦無益)[유산한 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또한 이로움이 없으니]

독서불가종하거(讀書不思終何居)[책을 읽어도 생각하지 않으면 마침내 어디에 머무를까]

이처럼 옛 선비들은 산을 좀 더 품격 있게 즐기면서도 실제 생활 속에서 가까이 두었다. 자신보다 앞선 이가 쓴 시문에 차운하여 기록하면서 산을 오르는 어느 한순간도 자신이 선비임을 잊지 않았다. 국망봉에 올라 임금을 향한 참마음을 발현하고, 선현들이 남긴 발자취를 높이 받들고 선현을 더욱 그리워하였다.

이황은 등산의 묘함은 굳이 시력을 다하여 멀리 바라보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짚신과 명아주 지팡이만으로도 산에 올라 임금을 생각하고 학문을 생각하며 고아(高雅)한 풍류를 즐겼던 옛 선비들을 우리는 반만이라도 따를 수 있을까.

[옛 선비들의 기록과 후인들을 위한 배려]

권정침(權正忱)[1710~1767]은 「소백유록(小白遊錄)」에서 “무릇 산이란 것은 크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얻을 수 있으면 명산이 될 수 있는 법이라고 한다. 소백산은 멀리 동남쪽 궁벽한 곳에 있어 천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한 번 퇴계 선생이 오르고, 신재가 문예적 표현으로 평하여 그 명승을 기록함으로써 산과 물의 이름이 지어졌다.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나 나무 한 그루는 은총을 입은 것이며 사람의 입안을 향기가 나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내 소견을 간단히 적어 뒤에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대략이나마 생각해보고 기록하여 스스로 한가롭게 지낼 때 잠을 깨우는 자료로 삼기도 하고, 또 지금 소백산을 유산해 보고 싶으나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현재까지 확인된 소백산을 유산(遊山)하고 남긴 최초의 기록으로는 1549년(명종 4)에 퇴계 이황이 쓴 「유소백산록」이다. 퇴계의 유산록이 나온 이후 소백산을 유산하는 사람들에게 퇴계의 유산록은 본보기가 되었다. 2013년 영주문화유산보존회에서 간행한 『소백산-국립공원 소백산 유산록 및 시문 조사 발굴 사업』2에 실린 1900년까지의 기록만 살펴보더라도, 소백산에 대한 유산록과 유산기로 이황, 신언(申漹), 한산두(韓山斗) 외 21명, 작품 21편이 전한다. 그리고 소백산에 대한 시문을 남긴 작가는 74명이고, 작품은 228편이다. 가장 많은 시를 남긴 이가 서재정(徐在正) 18편, 서성렬(徐成烈) 13편, 김휘준(金輝濬) 8편인데, 그중 황준량(黃俊良)은 차운시(次韻詩)만 27편을 남겼다. 산사(山寺)와 관련된 시문은 작가 60명, 작품 134편인데, 주세붕의 작품이 6편이나 된다. 죽령에 대해서는 작가 84명에 작품 119편, 그리고 축문 및 기우문(祈雨文)을 쓴 작가는 8명, 작품 22편인데, 그중 이준(李埈)이 쓴 것이 총 6편이다. 그 외 안축(安軸)이 쓴 「죽계별곡」 1편이 있다.

이황을 비롯한 옛 선비들이 소백산을 오르면서 많은 기록을 남긴 이유는 오로지 나중에 소백산을 오르는 사람을 위한 배려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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