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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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後三國 時代 |
영어공식명칭 | Later Three Kinjgdoms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방기철 |
[정의]
강원도 영월 지역에서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가 정립하였던 시대의 역사.
[개설]
신라는 하대[선덕왕~경순왕대](780~935)에 이르러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왕위 쟁탈전이 계속되었다. 거듭되는 실정으로 민중들은 도탄에 빠져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지방에서 독립한 세력들은 점차 호족(豪族)이 되어 갔다. 이 중에서도 견훤(甄萱)과 궁예(弓裔)는 국가를 수립하여 신라에 정면으로 맞섰다. 신라의 비장(裨將)이었던 견훤은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령하여 왕위에 올랐다. 900년 완산주(完山州)에 입성하여 도읍으로 정하였다. 견훤이 의자왕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견훤은 백제 유민들의 반신라적 분위기에 편승하기 위하여 국호를 후백제로 정한 듯하다. 한편 궁예는 901년 현재의 개성(開城)인 송악(松岳)을 근거지로 고려를 건국하였다. 궁예가 건국한 고려는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여 후고구려로 부른다. 901년 후고구려의 건국부터 후백제가 멸망하는 936년까지가 후삼국 시대이지만 실제로는 전후를 포함하여 후삼국 시대로 인식한다. 그래서 이 시기를 나말여초(羅末麗初) 또는 신라하대(新羅下代)로 표현하기도 한다.
[후삼국 시대의 영월]
후삼국 시대 영월 지역은 궁예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궁예의 출자(出自)는 명확하지 않은데 신라 왕실의 일원이지만, 버림받은 인물로 여겨진다. 궁예는 10세경에 세달사(世達寺)에 출가하여 법호를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궁예가 출가한 세달사는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흥교사(興敎寺)이다. 891년 궁예는 환속하여 죽주(竹州)의 호족 기훤(箕萱)에게 몸을 맡겼다가 이듬해 현재의 원주 지역인 북원(北原)에 근거지를 둔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양길은 궁예에게 원주의 동남 지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궁예는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를 근거지로 삼고, 영월(寧越)·평창(平昌)·울진(蔚珍)을 거쳐 강릉(江陵)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후 궁예는 양길에게서 독립하면서 영월·평창·정선(旌善)·삼척(三陟)과 강릉으로 이어지는 지역을 확보하였다. 이어 궁예는 고성(高城)·인제(麟蹄)·양구(楊口)·화천(華川)·철원(鐵原)까지 진출하였고, 900년 양길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충청북도 일대까지 완전히 석권하였다. 901년 송악을 근거지로 고려를 건국한 궁예는 904년 국호를 대동방국(大東方國)이라는 뜻의 마진(摩震)으로 바꾸었다. 905년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삼았다. 905년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하였다가 911년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바꾸었다. 궁예는 경기도·황해도·강원도·충청도까지 세력을 크게 넓혔지만, 918년 왕건(王建)·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 등에 의하여 왕위를 빼앗겼다. 이후 영월 지역은 왕건의 영향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