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34 |
---|---|
한자 | 高麗 時代 |
영어공식명칭 | Goryeo Dynasty|Goryeo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방기철 |
[정의]
918년 고려가 개창한 이후 1392년 멸망할 때까지 강원도 영월 지역의 역사.
[개설]
후삼국 시대 영월은 궁예(弓裔)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918년 왕건(王建)이 왕위를 찬탈하자, 강릉의 토호(土豪) 김순식(金順式)은 왕건에게 복속을 거부하였다. 그렇다면 영월 지역도 왕건의 영향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김순식이 왕건에게 복속하면서 영월 지역은 고려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고려 시대의 영월]
영월 지역은 현종(顯宗) 대에 주천현(酒泉縣)이 폐지되면서 원주에 이속되었다. 1167년(의종 21) 내성군(奈城郡)을 폐하고 영월군(寧越郡)으로 개칭되어, 영월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였다. 고려는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였고, 995년에는 10도제를 실시하였다. 이때 영월은 지금의 충청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해당하는 중원도(中原道)에 속했다. 전국에 경기(京畿)·양광(楊廣)·경상(慶尙)·전라(全羅)·교주(交州)·서해(西海)의 5도를 설치하고,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동계와 북계의 양계(兩界)를 설치한 5도 양계제가 실시되면서, 영월 지역은 5도 중 양광도에 편입되었다. 고려 시대 영월은 원주의 속현이었던 만큼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1372년(공민왕 21) 영월 출신 연달마실리(延達麻實里)가 중국에서 환관으로 공을 세우자 영월군으로 승격시키고, 지군사(知郡事)로 하여금 통치케 하였다.
고려 시대 영월 지역에는 거란[契丹], 몽골[蒙古], 합단적(哈丹賊), 왜구(倭寇) 등의 침략이 있었다. 1215년(고종 2) 거란의 유민 야사불(耶斯不)이 중심이 되어 대요수국(大遼收國)을 건국하고 거란족의 부흥을 꾀하였다. 1216년 8월 거란족은 고려를 침략하여 압록강 접경지역을 노략질하였고, 1217년 5월에는 강원도 지역을 침략하였다. 원주에서 고려군에게 패한 거란군은 영월을 지나 평창으로 향하였다. 이때 영월의 민중들은 완택산성(莞澤山城)으로 피신하였고, 완택산성에서 고려군을 도와 거란족을 물리쳤다.
몽골은 1231년(고종 18)부터 1259년까지 30여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고려를 침략하였다. 특히 1253년 4차 침략시 강원 지역의 피해가 매우 컸다. 몽골의 4차 침략 당시 강원 북부 지역과 원주가 함락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영월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287년(충렬왕 16) 합단적이 만주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합단적은 원의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하자, 1290년 12월 두만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하였다. 합단적이 쌍성(雙城)과 등주(登州)를 함락시키자, 충렬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합단적은 철령(鐵嶺)을 넘어 치악성(雉嶽城)을 공격하였다. 원주별초(原州別抄)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冲甲)은 합단적을 물리쳤고, 합단적은 충주로 향하였다. 이때 합단적의 일부가 영월 지역을 침략하였는데, 영월의 민중들은 완택산성에서 합단적에 맞섰다. 완택산성에서 영월의 민중들이 합단적의 배후를 공략한 것이 원주에서의 승리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는 1223년부터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1350년(충정왕 2) 이후 왜구는 거의 매년 고려를 침략하였다. 왜구가 영월 지역을 침략한 것은 1381년(우왕 7)이다. 1382년 3월에도 영월에 왜구의 침략이 있었다. 왜구가 영월에 머무른 기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왜구는 침략한 지역을 불태우고 노략질하였던 만큼, 영월 지역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