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선 개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69
한자 寧越線 開通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9년 5월 3일연표보기 - 영월선 착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5년 12월 31일연표보기 - 영월선 완공

[정의]

강원도 영월군을 지나는 철도 영월선에 대한 개관.

[개설]

철도는 1814년 영국의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이래 오늘날까지 대중교통 및 기간산업에 있어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성장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1899년 9월 18일 개통된 인천~노량진을 연결하는 경인선이며, 강원도에 최초로 가설된 철도는 1914년 9월 16일 개통된 경원선(京元線)의 강원도 통과 구간이다.

[배경]

영월 지역에 대한 철도 부설이 최초 논의된 시점은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조선철도회사는 충북선의 연장으로 충주-제천-영월 구간의 착공을 인가받았지만 착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무산된 영월 지역에 대한 철도 부설은 광복 이후 다시 추진되었다. 정부가 3대 산업선인 영월선·영암선(榮岩線)·문경선(聞慶線) 건설을 추진하면서 철도 부설이 구체화된 것이다.

[영월선의 개통]

영월선은 1949년 5월 3일 ECA[경제협력처] 원조로 착공하였으며, 1949년 11월 15일 제천~송학 간 9.8㎞를 개통하였다. 하지만 영월선의 건설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영월은 38도선에 인접한 곳이었다. 하지만 영월선 공사가 갖는 중요성에 따라 공사는 전쟁 중인 1952년 10월 15일 교통사업특별회계 예산으로 재개되었다. 그 결과 1956년 1월 17일 제천에서 영월에 이르는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 기간 중 개통된 구간은 1953년 9월 1일 송학~쌍용 간 7.9㎞, 1955년 9월 10일 쌍용~연당 간 7.6㎞가 개통되어 순차적으로 열차를 운행하였으며, 1955년 12월 31일 영월선이 완공되었다. 1956년 1월에는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영월읍~영월화력발전소 간 3.3㎞도 개통되었다. 영월선 완공 이후로도 철도 건설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1957년 3월 9일 영월~함백 간이 완공되어 개통되면서 철도의 명칭이 ‘함백선’으로 변경되었으며, 1973년 10월에는 태백선에 흡수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월선은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건설되었으며, 또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는 영월에 위치한 화력발전소의 운영과 영월군 내 중석 등 지하자원의 개발과 관계 깊다. 먼저 화력발전소를 보면, 1951년 봄 정부는 전력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전업기술단을 통하여 발전 및 송전 시설의 긴급 복구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 결과 1952년 11월 화천수력발전 제1호기가 복구되어 2만 7000㎾를 생산하게 되었는데, 당시 국내 발전시설로는 화천·청평·보성강의 3개 수력발전시설과 영월·당인리 2개 화력발전시설이 가동되고 있었다. 영월에 위치한 화력발전소를 운영하려면 그 원료가 되는 석탄의 수급도 중요하였다. 이 같은 배경에서 정부는 원활한 에너지 공급을 위하여 석탄 생산에도 전력을 다하였다. 1956년 영암선과 영월선이 건설되고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함으로써 영월 지역이 주요 에너지원 공급지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과거 수입탄에 의존하였던 것에서 벗어나 석탄의 생산과 운반을 전부 국내 공급체계로 해결한 것이다.

한편 영월선은 중석과 아연 등 지하자원 개발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는 한국전쟁 직후 대한민국의 열악한 산업 환경과 관계 깊었다. 정부로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기 위하여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는데, 정작 수출로 외화를 벌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문제를 타개하고자 정부는 영월군 상동면에 산재한 중석광의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결국 1952년 3월 한미중석구매협정에 따라 상동면 중석광은 미국의 기술지원으로 개발되었으며, 정부에서도 우선적으로 개발을 추진하였다. 1952년에는 3,789톤을 생산하던 것이 1953년에는 7,416톤, 1954년에는 1만 5000톤으로 증산되었다. 한국은 자유진영에서 미국 다음가는 중석 생산국으로 등장하였으며, 1953년에는 우리나라 광물 수출량의 85%를 중석이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중석을 운송한 주역이 바로 영월선이었던 것이다.

영월선은 영월 지역의 교통 체계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기존 영월군 내의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무거운 목재와 곡식, 소금과 생선 등을 운반하던 배와 뗏목은 1955년 제천~영월 구간 38.1㎞의 영월선 철도 개통을 기점으로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영월선의 개통으로 영월 지역의 산업발전은 물론, 주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큰 변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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