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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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承休旌閭 |
이칭/별칭 | 효자 박승휴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예당로 413[신대리 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1687년 - 박승휴 효자 명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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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0년 3월 - 박승휴 정려 중수비 건립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0년 5월 - 박승휴 정려각 재건 |
현 소재지 | 박승휴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예당로 413[신대리 5] |
성격 | 정려 |
양식 | 홑처마 맞배지붕|굴도리식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대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박승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개설]
박승휴 정려는 조선 후기의 효자 박승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박승휴(朴承休)[1606~1659]는 덕산현 출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자미(子美)이다. 아버지는 석곡(石谷) 박안행(朴安行)[1578~1656]으로 덕산현 장촌면 석곡리[현 응봉면 송석리]에 거주하였다. 동생은 자이(子以) 박승건(朴承健)[1609~1667]이다. 1650년(효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병조정랑, 사간 등을 역임한 뒤 홍주목사를 지냈다. 박승휴는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어버이가 거처하는 방을 한 번도 등져 앉거나 누워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홍주목사로 재임하던 중 아버지의 병이 위독해지자 한겨울에 죽순을 구하고 잉어를 잡아 먹였다. 또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먹여 아버지의 수명을 3일간 연장시키는 등의 효행을 보였다. 박승휴는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박승휴는 효행으로 1687년[혹은 1689년] 효자 명정을 받았다.
[위치]
예산군 광시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5㎞를 가면 광시면에 이른다. 박승휴 정려는 도로 서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있는 남향 경사면 구릉에 있다.
[변천]
박승휴 정려 정문에 1990년 3월 세운 정려 중수비가 있다. 정려 중수비 뒷면에는 박승휴의 효행 사실 및 박승휴 선조 이력 등과 함께 박승휴가 1689년(숙종 15) 명정 받아 300여 년을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명정과 관련한 시기가 중수비와 기타 지리지에서는 1689년, 예조에서 작성한 『효행등제등록』에서는 1687년(숙종 17)이라고 언급하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명정과 정려 건립 시기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정려각은 1990년 5월 예산군의 지원으로 개건한 것이다. 박승휴의 묘는 충청남도 보령군 천북면에 있었으나 1989년 3월 예산군 응봉면 주령리로 이장되었다. 묘갈명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형태]
박승휴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두 단의 시멘트 기단을 쌓고 위에 화강암으로 된 방형의 높은기둥 주춧돌을 세우고, 원기둥을 올렸다. 굴도리식 가구 양식으로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양옆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해 놓았다. 정려의 4면은 홍살이 설치되어 있다. 정려 주변은 벽돌담을 돌려 보호시설을 해 놓았다.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에는 홍살문 형태의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에는 ‘효자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오위도총부부총관 행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 박승휴 지문(孝子贈嘉善大夫吏曺參判兼同知經筵義琴府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 行通訓大夫司憲府執義兼春秋館編修官朴承休之門)’이라고 쓰여 있다. 명정 현판 뒤에 명정부터 중수한 이력에 대한 사항이 기재되어 있는데 정사년 5월, 을사년 5월, 계묘년 10월, 을해년 5월, 임술년 8월, 을사년 5월, 1989년 5월, 2003년 4월 총 8번의 중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박승휴 정려각과 중수비는 1990년 예산군의 지원으로 세운 것이다. 하지만 중수비에 정려 중수 시기 등이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연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