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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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黑齒常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고대/삼국시대/백제 |
집필자 | 조민희 |
출생 시기/일시 | 630년 - 흑치상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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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660년 - 흑치상지 임존성을 근거로 백제부흥운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663년 - 흑치상지 항복하고 당으로 건너감 |
몰년 시기/일시 | 689년 - 흑치상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699년 - 흑치상지 묘지명 제작 |
부임|활동지 | 임존성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마사리 |
묘소|단소 | 흑치상지 묘지 - 중국 허난성 뤄양 망산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대표 관직 | 달솔|풍달군장|절충도위 진웅진성대|좌령군외장군양주자사 |
[정의]
예산 임존성에서 백제부흥운동을 벌인 백제 말기의 무신.
[개설]
흑치상지(黑齒常之)[630~689]는 백제 말의 장군으로,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임존성(任存城)을 근거지로 백제부흥운동을 벌이다가 항복하여 당나라로 건너간 뒤 대장군의 지위까지 올랐다.
[활동 사항]
흑치상지는 백제 때 2품관인 달솔(達率)에 올라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7척[약 210㎝]이 넘는 키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하자 흑치상지도 항복하였으나 가까운 족장 10여 명과 함께 반기를 들어 임존성을 근거지로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신라군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등 한때 200여 성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으나 내분으로 인해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였고, 이후 당나라로 건너갔다.
664년 흑치상지는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돌아와 절충도위 진웅진성대, 즉 웅진도독부의 군장이 되었으나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토번과 돌궐을 치는 데 공을 세우는 등 관직이 연연도대총관 연국공(燕然道大總管燕國公)에까지 이르렀다. 국공(國公)이란 당나라에서 9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던 귀족의 직위 중 세 번째로, 3,000호의 토지를 소유하는 고관이었다. 흑치상지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 때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주흥(周興) 등의 무고(誣告)로 옥에 갇혔다가 689년 10월 자결하였다.
[묘소]
1929년 10월 중국 허난성 뤄양 망산 아래에서 흑치상지와 아들 흑치준(黑齒俊)의 묘비명이 발견되었다. 묘지명에는 흑치상지가 원래 부여씨였으나 당나라에서 흑치(黑齒)로 봉해져 자손들이 흑치씨로 불리게 되었다고 기록하는 등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묘지석은 중국 남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