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529 |
---|---|
한자 | 建立年代-韓國 最古-木造建築修德寺大雄殿 |
영어공식명칭 | The oldest wooden architecture with written record of its construction date in Korea, the Main Hall of Suduck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사천리 19]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정은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308년(충렬왕 4) - 예산 수덕사 대웅전 건립 |
---|---|
예산 수덕사 대웅전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사천리 19]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있는 수덕사의 대웅전.
[개설]
수덕사의 주법당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건축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1308년 중창된 전각으로 건립 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으며,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수덕사 대웅전 내부에는 보물 제1381호 예산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삼세불상은 1639년(인조 17)에 수연(守衍)을 비롯한 7명의 비구가 참여하여 조성한 것으로, 수덕사의 중흥조인 만공(滿空) 선사가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에서 옮겨 온 불상이다. 주존불인 석가여래가 앉아 있는 수미단은 1308년 중창 시 제작된 작품으로 판단된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과 관련하여 1937년의 수리 공사 시 ‘1308년 4월 17일 기둥을 세우다[至大元年戊申四月十七日立柱]’ 라는 묵서명(墨書名)이 발견되면서 충렬왕(忠烈王) 34년[元 至大 元年]인 1308년이라는 제작 연대가 밝혀졌다. 이를 통해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제작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졌으며 이 시기 목조 건물 양식 편년의 기준이 되었다.
수덕사는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다. 수덕사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되어 있고, 다른 기록에는 백제시대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이 중창한 뒤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우리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수덕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은 58세로 입적한 백제 승 혜현(慧顯)[627~649]이 북부(北部) 수덕사(修德寺)에 살았다는 『속고승전(續高僧傳)』[권28, 백제국(伯濟國) 달라산사(達拏山寺) 석혜현전(釋慧顯傳)]과 혜현이 훤조(喧噪)를 피하기 위해 수덕사를 떠났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권5 혜현구정조(惠現求靜條)]. 이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19 덕산현(德山縣) 불우조(佛宇條)에는 “재덕숭산사유취적불운이루(在德崇山 寺有翠積拂雲二樓)”라는 수덕사 관련 기록이 전한다. 이를 통해 당시 취적루(翠積樓)와 불운루(拂雲樓)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의 건축적 특징]
대웅전은 우리나라 건축의 기본을 잘 보여 주는 건물로서 들보 이상에 해당하는 지붕[上分], 바닥 이상의 부분인 축부[中分], 초석 이하의 부분인 기단[下分]이라고 하는 세 개의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기둥을 세우고 보를 걸고 도리를 올린 다음 서까래를 배열하고 다시 그 위에 기와를 덮어 완성한 소위 대량식 건물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1308년에 조성된 국보 제49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수덕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대지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정면 3칸[5.454m], 측면 4칸[7.272m]의 주심포 건물에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 양식의 건축물이다. 지붕 무게를 분산시키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가 기둥 머리에 창방을 걸어 공포가 바로 올라가는 형태로 있는 것이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전반적으로 각 부재가 크고 굵어 안정감이 있으며 맞배지붕을 올려 드러난 측면가구의 아름다움은 같은 시대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봉정사 극락전과는 구별되는 진전된 특징을 보여 준다. 수덕사 대웅전 이외에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주심포 건물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정도이다.
수덕사 대웅전의 겹처마 맞배지붕은 11량의 육중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수직과 수평 대비를 이용하여 우아한 이미지가 돋보이는데 화려한 장식성이 가미되어 독특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배흘림이 현저한 기둥은 낮고 기둥 사이는 넓어서 안정감을 주며, 마루보와 대들보의 낙차를 크게 두고 우미량(牛眉樑)을 겹으로 걸어 지붕에서부터 계속된 우미량의 율동미가 솟을합장의 곡선, 이중량(二重樑)의 곡면과 함께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기둥은 배흘림이 강한 원주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측면 중앙에만 예외적으로 사각기둥을, 내부에는 4개의 듬직한 고주(高柱)를 앞뒤로 2개씩 배열하였다. 정면에서 보면 기둥의 높이에 비해 간격이 넓어 안정감이 돋보인다. 이러한 안정감은 종량 위 포대공(包臺工) 좌우에 사람 인(人) 자 모양의 솟을합장을 설치한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보 상부에 걸친 우미량도 구조적인 측면과 장식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구의 특징은 아름다운 우미량의 도리와 도리 사이를 결구하고, 종도리를 안으로 아름답게 휘어진 솟을합장으로 물고 있는 점이며, 장식적이고 화려한 조각과 아름다운 곡선을 보이는 부재 등은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예이다.
이처럼 수덕사 대웅전은 배흘림기둥을 연결하는 경쾌한 인방(引枋)[기둥과 기둥 사이, 또는 문이나 창의 아래나 위로 가로지르는 나무], 고주와 평주(平柱)를 잇는 퇴보, 고주 칸을 맞잡는 대들보 등의 직선재와 이들을 지탱하는 장식적인 포대공, 그리고 우미량의 조화가 특히 아름답다. 또한 같은 시대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등의 주심포식 전각,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 연화두식, 배흘림기둥 등과 공통된 시대적 특징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안정감과 구조적 측면에서 더욱 진전된 형식임을 알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형이 주는 독특한 조형성은 백제 이래 내려온 전통성과 합일된 고려시대 미의 기준을 알려 준다.
수덕사 대웅전은 곱게 다듬은 긴 댓돌을 여러 겹으로 포개어 쌓은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기단의 좌우에는 건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놓았다. 대웅전의 전면 기단은 장방형의 화강석을 바른층쌓기로 6단을 쌓아 10척 높이를 이루었으며, 후면은 2단쌓기로 하고, 전면의 양측에는 계단을 설치하였고, 건물은 전면이 3칸, 측면이 4칸인데, 평면으로 보아 전면과 측면의 비가 1 : 1.315가 되어 전면이 긴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주심포계의 맞배지붕을 하였다. 네모나게 다듬은 주춧돌의 윗면에는 기둥을 받치는 둥근 기둥자리가 낮게 마련되어 있다. 기둥은 둥근 기둥으로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의 정도가 뚜렷하지만, 건물 옆면의 가운데기둥은 단면이 네모나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昌枋)[한식 나무 구조 건물의 기둥 위에 건너질러 장여나 소로, 화반을 받는 가로재]이 둘러져 있고, 네 모서리기둥과 창방이 맞물려 있는 위치에는 앞면과 뒷면 쪽으로만 첨차(檐遮)[주두, 소로 및 살미와 함께 공포를 구성하는 기본 부재로 살미와 반턱맞춤에 의해 직교하여 결구되는 도리 방향의 부재]를 끼워 놓았다. 첨차는 기둥머리 위에 짜인 쇠서[牛舌] 모양의 제공(諸工)[첨차와 살미가 층층이 짜인 공포]을 받치고 있는데, 제공의 끝부분 위에는 짧은 장여를 놓아 외목(外目)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기둥머리 위의 첨차는 뜬장여와 장여, 주심(柱心)도리를 차례대로 받치는데, 뜬장여는 앞면 창방 위의 포벽(包壁)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편 옆면의 가구는 건물을 설계할 때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결구(結構)한 모습을 보여 준다. 곧 창방 위의 유연한 맞배지붕 처마선 아래에 보이는 박공(牔栱) 부분의 구성이 특히 아름답다. 협간(夾間) 중에 앞면 쪽에는 외짝의 빗살문을 달아서 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창방 위쪽의 기둥머리에는 덩굴무늬인 당초문(唐草紋)이 이어진 파련(波蓮) 모양의 받침을 놓아서 단면이 항아리 모양인 충량(衝樑)을 받았으며, 그 위에는 다시 파련대공(波蓮臺工)[덩굴나무가 서리어 나가는 모양을 그린 대공]을 얹어 고주 윗몸에서부터 나온 가로 부재를 받쳤다. 또한 그 위에는 지붕의 무게를 전달하는 동자기둥을 받치는 보인 우미량이 놓여 있는데, 지붕의 무게가 마루보 밑의 우미량에서 대들보 위에 얹힌 우미량으로 전달되고, 다시 파련대공으로 받치고 있는 우미량으로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 우미량의 율동적인 구성은 마루보 위쪽에서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는 솟을합장의 곡선미, 이중량의 중량감있는 곡면과 더불어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의 또 하나의 특징은 1937년 대웅전 보수 당시 불전의 벽에서 발견된 벽화이다. 당시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 후 방치되어 흙더미로 변해 버려 현재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조사 당시 그려놓은 모사도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한다. 당시의 조사보고서를 참고해 보면 벽화는 창방과 고주 주위의 벽면에 주락비천(飛天), 작은 부처들, 극락조(極樂鳥), 공양화(供養花) 등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며 흑색과 주색 등의 일부 채색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특징]
수덕사 대웅전의 내부에는 1639년에 조성된 석가, 아미타, 약사불의 목조삼세불상[목조삼불좌상]이 주존불로서 봉안되어 있다. 삼세불이란 본래 과거불·현재불·미래불[연등불·석가불·미륵불]을 말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와 약사불을 안치하는 도상이 유행하였다.
수덕사 대웅전의 목조삼불좌상에서는 불상 내부에서 복장유물이 발견되었고 이를 통해 좀 더 자세한 내력도 밝혀졌다. 복장유물은 후령통과 다양한 전적류, 액주름형 직령 등의 복식이 발견되었으며 『묘법연화경』과 『불설관세음경』 등 17세기 초반에 간행된 목판본이 다량 나왔다. 복장발원문에 의하면 목조여래삼불좌상은 1639년(인조 17) 만행산(萬行山) 풍국사(豊國寺) 보광전(寶光殿)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며 수연(守衍) 비구가 중심이 되어 불상을 만든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현재 보물 1381호 예산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로 지정되어 있다.
목조삼불좌상은 목조대좌에 앉아 있는데, 특히 주존불인 석가불은 수미좌 위에 연화좌가 있는 대좌에 앉아 있다. 연화대좌는 수미좌보다 다소 작은 크기인 점에서 원래 한 세트는 아닌 것으로 판단되지만 수덕사 대웅전의 창건과 관련되는 유물로 추정된다. 수미좌의 위에 놓여 있는 상단부의 연화좌는 활짝 핀 연꽃잎에 아름다운 화문들이 장식되어 있다. 연꽃잎들을 따로 만들어 못으로 고정한 기법이나 금으로 잎맥과 화문을 그려 붙이는 형식은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새로운 표현 기법이다. 이러한 대좌 형식과 문양은 중국 송대와 연관되며 고려 후기 불교회화에 그려진 대좌 형식이나 화문과도 거의 흡사하다.
연화좌를 받치고 있는 육각의 높은 수미단은 전체가 삼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당초, 모란이 담긴 반, 금강저 등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 대좌 장식들은 1374년의 황해도 심원사 대웅전의 불단과 비교된다. 따라서 수미단과 연화대좌는 중국 송대의 영향이 반영된 새로운 대좌 형식으로서 14세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1308년 수덕사 중창 당시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수덕사 대웅전의 조형적 아름다움]
예산군 수덕사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각 부재가 크고 굵어 안정감이 있으며 맞배지붕을 올려 드러난 측면가구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건립연대가 1308년으로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으며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의 특징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 건물에 맞배지붕 양식의 건축물로, 배흘림기둥을 연결하는 경쾌한 인방, 고주와 평주를 잇는 퇴보, 고주 칸을 맞잡는 대들보 등의 직선재와 이들을 지탱하는 다분히 장식적인 포대공, 그리고 우미량의 조화가 특히 아름답다. 또한 같은 고려시대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등과 공통된 특징을 보여 주면서도 안정감과 구조적 측면에서 진전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외형이 주는 독특한 조형성은 백제 이래 내려온 전통성과 합일된 고려시대 미의 기준을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