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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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禮山地方-天主敎-盜掘事件 |
영어공식명칭 | Catholic Church of Yesan and Body-snatching atempt made by Ernst Oppert |
이칭/별칭 | 덕산굴총사건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성태 |
[정의]
내포 지역 최초의 천주교 전파지인 동시에 전국적 확산의 배후지 역할을 한 예산 지역의 천주교 개관.
[개설]
예산 지역은 조선시대 내포 지방에서 최초로 천주교가 전파된 곳이다. 조정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 확산에 중요한 배후지 역학을 하였다. 한편, 이 과정에서 발생한 오페르트 일당의 남연군묘 도굴 시도는 문호개방론의 연장선에서 열강의 통상권 선점 의지와 박해의 종식을 기대한 천주교도들의 열망이 복잡하게 얽혀 발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내포 천주교의 시원 ‘여사울’]
‘여사울’은 예산 지방 사투리로 ‘여술’이라고도 불린다. 여우가 자주 출몰해서 여술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자료에는 호동(狐洞)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여사울은 내포 천주교회의 시발점이다. 박해기에 활동하던 프랑스인 선교사들에 의하면 “내포 지방의 천주교는 1780년대 중반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여사울에서 비롯되었다.”라고 전해진다. 충청감사 박종악의 『수기』에도 이존창과 함께 홍낙민을 사학의 종장(宗匠)으로 지목하며 내포 천주교 확산의 진원지로 ‘호동’을 거론하고 있다. 당시 호동, 즉 여사울의 가구 수 100호 가운데 약 80호가 사학에 물들었다고 하였다. 여사울에서 시작된 천주교는 내포 지역은 물론 충청도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이존창과 홍낙민 등이 예산, 공주, 청양 지역의 지인 및 친인척들과 긴밀히 연결되었던 정황으로 미루어 이들에 의해 내포와 충청도의 천주교가 급속히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1791년 박해 이후 여사울을 떠난 이존창이 홍산과 전라도 고산 등지로 이주하여 전교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여사울 출신 복자 김희성 프란치스코가 경상도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순교였고, 김희성의 아들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 역시 공주 무성산에서 활동하다가 순교하였다. 여사울뿐만 아니라 덕산 별암리의 강완숙이 서울에서, 같은 동리 고성대가 처음에는 전라도 고산에서 그리고 후에서 동생 고성운과 함께 경상도 청송에서 활동하다 순교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천주교 확산의 배후지로서 여사울과 예산 지방이 큰 역할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초의 예배당이 설치된 마을 ‘별암리’]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는 한국 천주교 초창기의 발판을 다진 인물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다. 자연지명 ‘별아미’ 혹은 ‘별암리’로도 불린다.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보필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한 복자 강완숙 골롬바의 신앙적 고향이다. 강완숙의 아들 복자 홍필주 필립보와 복자 고성대 베드로, 고성운 요셉 형제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서울과 경상도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한편, 이른바 신당(神堂)으로 불리는 곳을 훼철하였다는 관찰사 박종악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신자 공동체가 집회를 하던 일종의 예배당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앙 공동체가 일정한 체계를 갖추고 신앙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으며, 합덕 응정리의 이른바 천당(天堂)과 더불어 기록상 최초의 예배당 혹은 경당이라고 할 수 있다.
[천주 신앙의 젖줄이 된 삽교천과 무한천]
여사울은 삽교천과 무한천의 합수 부근에 있다. 공교롭게 두 하천의 수계를 따라 천주교 주요 사적지가 분포해 있다. 여사울에서 삽교천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당진과 예산의 경계 지점에 신리-거더리마을이 나온다. 신리-거더리 마을은 박해기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은거하던 곳이다. 거더리는 당진과 예산에 동시에 걸쳐 있어 ‘윗거더리’는 예산 땅이 된다. 하천을 더 거슬러 가면 오페르트 일행의 기착지 구만포가 나오는데, 밀물을 타고 바닷배가 들어오는 마지막 포구였다. 구만포는 대천천이 흘러내려 삽교천에 합류한다. 대천천에는 복자 구성열 바르바라의 고향 한내장벌이 접하여 있고, 강완숙의 별암리와도 지척이다. 다시 삽교천의 구만리포에서 상류로 오르면 삽교읍에 거의 다다른 곳에 ‘배나드리’가 있다. 섬처럼 생긴 마을이라 배를 타고 드나들어 배나드리라 불렀다고 한다. 삽교천변의 지형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배나드리도 복자 인언민이 배출된 순교자의 땅이다.
한편, 여사울에서 무한천을 거슬러 가면 예산읍을 지나 대흥에 이른다. 복자 김정득의 출신지인 동시에 참수된 곳으로 대흥의 옛 관아와 함께 봉수산성지가 인근에 있다. 신암면 계촌리나 광시면 우라내 등은 오래된 공소로도 유명하다. 무한천 상류는 청양의 다락골성지와도 연결된다.
[충청도 최초의 본당 양촌과 간양골]
1886년 한불조약의 체결로 선교사들의 활동이 보호되고, 내용적으로는 신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지하교회의 형태를 띠던 천주교회가 양성화되면서 명동성당을 위시해서 전국의 주요 거점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가장 중요한 선교 지역이었던 내포를 위해 두 명의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양촌본당의 퀴를리에 신부와 간양골본당의 파스키에 신부였다. 오늘날 양촌은 고덕면 상궁리에 있고, 간양골은 예산읍 간양리이다. 내포 지역은 가장 많은 신자를 배출한 곳이었던 동시에 1866년 박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었다. 따라서 내포 교회의 회복이 한국 천주교회 재건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박해를 피해 산지로 숨어든 교우촌을 돌보는 한편 흩어진 교우들을 다시 모아들일 거점으로 간양골과 양촌을 각각 본당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간양골본당은 아산의 공세리로, 양촌본당은 당진의 합덕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개항 이후 양촌과 간양골의 충청도 최초 본당 설정은 내포 천주교회에 대한 예산 지역의 교회사적 위상을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예산 지역의 성당]
예산성당은 1927년 합덕성당에서 분리 설립되었다. 1988년 산성리본당이 분가·설립되기 전까지 예산본당으로 불렸다. 초대 주임으로는 합덕본당의 보좌신부였던 구천우 요셉 신부가 파견되었다. 분리 당시 합덕 주임 페랭 신부에 의하면 예산 읍내 교우는 약 5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간양골, 신례원, 오촌 등 주변의 옹기 교우촌과 공소의 신자수가 증가 추세에 있었다. 초대 회장 윤창규의 희사와 교우들의 노력으로 일찍부터 성당 건축을 추진하였고, 현재의 성당은 1934년에 완공하여 1935년 9월 봉헌식을 가졌다. 1950년 홍성본당을 분가시켰으며, 1966년 삽교본당, 1977년 신례원본당, 1988년 산성리본당을 각각 분리시켰다. 예산성당은 2004년 4월 1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삽교성당은 삽교읍 신가리에 소재한다. 1966년 예산본당에서 분리되었으며, 초대 본당 주임은 에밀 보드뱅 신부이다. 현재의 성당은 1967년 4월 24일에 봉헌식을 가졌다. 삽교는 복자 인언민을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 초창기부터 교우촌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곳이었다. 본당에서는 인근의 삽교천변 ‘배나드리’를 함께 관리하고 있다. 1979년과 1986년에 덕산본당과 응봉본당을 각각 분리시켰으며, 2017년 6월 10일에는 본당설립 50주년 감사행사를 가졌다.
신례원성당은 예산군 예산읍 창소리에 있다. 1977년 10월 19일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은 우희수 발타사르 신부이며, 초대 주임신부 재임기에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분리 당시 본당의 관할구역에 내포 천주교회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여사울공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계촌리나 수철리와 같은 오래된 공소들로 인하여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는 이른바 구교우들이 많았다. 이후 여사울은 2008년에 분리하여 담당신부가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한편 2014년 이후로 이상호 요한 신부의 주도로 수철리공소를 정비하여 순례자들로 하여금 공소신앙의 유산을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덕산성당은 예산군 덕산면 읍내리에 있으며, 1979년 9월 19일 삽교본당에서 분리·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은 이창덕 마르코 신부이다. 관할구역은 읍내리를 중심으로 고덕, 구만리, 목리, 대치리 등이다. 현재의 성당은 1984년에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덕산은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곳이고, 남연군묘 등 천주교 역사와 밀접히 연관된 곳이 많다. 더욱이 해미성지로 연결되는 순례길에 위치하여 순례자들의 거점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응봉성당은 예산군 응봉면 노화리에 있다. 1986년 4월 1일에 삽교본당에서 분리·설립되었다. 김진화 바오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성당은 제4대 주임 변갑선 치릴로 신부에 의해 2001년에 건축되었다.
예산 산성리성당은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에 있으며, 예산역과 가까워 교우들에 의해 역전성당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1988년 8월 17일 예산본당에서 분리되어 윤여옥 안토니오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현재의 성당은 1991년부터 건축을 시작하여 제2대 주임 방경석 알로이시오 신부 재임 중인 1998년에 봉헌식을 가졌다.
[주요 공소와 성지]
여사울성지는 신례원본당 관할의 여사울공소였으나 2008년 성지본당으로 분리되었다. 초대 주임은 장동준 라파엘 신부이다. 지중해풍의 성당과 사제관은 2010년 10월 16일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성지로 조성된 ‘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사울은 내포 지역 천주교의 시원인데다가 지속적으로 많은 교우들이 신앙생활을 하며 교우촌을 이루었다. 현재의 사제관이 있는 언덕 꼭대기에는 1958년 3월 교구장 원 라리보 주교에 의해 축성된 공소 강당이 남아 있다. 강당이 건축된 시기와 규모를 보면 교우가 많은 큰 공소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매년 9월 1일 여사울성지에서 당진의 신리성지와 합덕성당을 거쳐 솔뫼성지까지 이르는 약 16㎞ 거리의 내포도보성지순례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대흥 봉수산성지는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에 있다. 옛 대흥관아 인근인데다가 의좋은형제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성지의 성당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봉수산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에 순교한 복자 김정득 베드로를 기념하는 곳이다. 복자 김정득은 여사울 출신 복자 김광옥과 사촌간이다. 형제는 공주 무성산에서 수도자와 같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고향으로 압송되어 김광옥은 예산에서, 김정득은 대흥에서 각각 순교하게 된다. 형제가 헤어지면서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하고 마지막 인사를 의좋은 형제답게 나누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공교롭게도 두 형제 복자를 기리는 이곳에는 의좋은형제전설에 따라 조성된 의좋은형제공원이 있다.
배나드리성지는 삽교읍 용동리에 있는 마을로 삽교천변에 있다. 도리라고도 부르는데, 그 까닭은 홍수가 나면 마을을 섬처럼 물로 둘러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섬이 된 마을에 배를 타야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배나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800년 해미에서 순교한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가 배나드리 출신이다. 배나드리는 지금도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기 때문에 하천변 둑 위에 작은 표지판과 정자로 성지임을 알려 주고 있다. 다만 배나드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장소가 있다. 용동3리 마을 안 주례 공소터에 기념비와 제단 그리고 쉼터가 소박하게 조성되어 있어 순교자의 신앙을 묵상할 수 있다. 모두 삽교성당에서 관리·관할한다.
양촌공소는 고덕면 상궁리에 있으며, 합덕본당의 전신으로 본래는 양촌본당이었다. 1899년 합덕으로 본당이 이전하고 공소로 남게 되었다. 현재의 공소건물은 합덕본당 7대 주임 페랭(P. Perrin)[白文弼] 신부에 의해 조성되었다. 1949년 노후화된 성당을 철거하고 그 부자재를 이용하여 새 공소를 건축한 것이다. 공소는 전통적인 목구조에 초가를 얹었고, 내부는 마룻바닥에 남녀분리를 위한 목막이 있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강당 제단부 벽이 사각의 돌출형 앱스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한옥의 전통 건축 방식이 천주교 예식에 적합하도록 조화를 이룬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공소 건물은 1960년대 말 목막이와 기둥을 제거하고, 실내 바닥을 콘크리트로 교체하며, 함석지붕을 교체하는 등 대수선을 거쳤다. 그러다가 붕괴 위험에 이른 2016년, 기둥과 사제·복사 방 그리고 앱스를 원형 복원하였다. 2017년에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공소 관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부속건물과 조경 작업을 실시하였다.
수철리공소는 예산읍 수철리의 작은 동네를 관통한 막다른 언덕에 있다. 그리고 공소를 지나 약 1㎞쯤 언덕 하나를 넘으면 간양골공소터가 나온다. 지척의 거리에 있던 두 공소는 매우 긴밀히 연결된 공동체였다. 간양골은 박해기부터 유래한다. 공주에서 순교한 신여석, 홍주 순교자 박회장, 유서방, 김동은 모두 이곳 간양골 사람이다. 양촌과 더불어 내포의 첫 본당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신례원본당의 노력으로 공소터가 보존되어 있다.
언덕을 넘어 수철리공소는 박해 때문에 와해된 신리마을 교우들이 피해간 곳이기도 하다. 1927년 페랭 신부에 의해 대사를 받는 공소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매우 크고 중요하게 여겨진 공소로 보인다. 현재의 강당은 1960년 황기완의 주도와 교우들의 봉사로 건축되었다. 낡은 공소를 신례원본당 주임 이상호 신부가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는 한편 강당과 마당을 정비하여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정기적인 미사도 거행된다. 모든 관리는 신례원본당 에서 하고 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개요]
오페르트 굴총사건은 1868년 4월, 유대계 독일인 오페르트가 미국인 자본가 젠킨슨 그리고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 신부와 몇 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합작하여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굴총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1860년대 들어 조선은 서세동점하던 서양 열강들의 역학 관계가 복잡하게 엮이고 있었다. 조선의 교우들은 프랑스인 주교들을 통해 평화적인 문호 개방을 이룩하여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대원군이 대대적인 박해를 단행한 것이다. 궁지에 몰린 천주교도들은 더욱 강력한 방법으로 문호 개방과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했다. 그리하여 리델 신부와 몇몇 교우들이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에 도움을 요청한다. 병인양요가 발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가고 통외분자(通外分子)로 낙인찍힌 천주교도들은 더욱 가혹한 박해로 내몰렸다.
오페르트는 이미 두 차례 내항(來航)을 통해 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대원군의 폭정에 지친 백성들의 민심과 개항에 대한 기대를 확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파악된 자원들을 활용하는 강력한 통상 욕구가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세 번째 내항을 시도한다. 제3차 원정의 목적지는 남연군 묘역이었다. 기선 차이나호와 소선 크레타호로 상해를 출발한 원정단에는 페롱 신부와 미국인 젠킨스 그리고 최지혁 요한을 비롯한 조선인 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배들이 1868년 5월 9일 아산만에 도착하자 크레타호로 갈아타고 이튿날 구만포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덕산관아를 습격하여 무기고를 탈취하고 덕산군 가야동으로 가서 파총(破塚)을 시도한다. 그러나 묘광이 견고하여 실패하고 5월 11일 다시 구만포를 거쳐 퇴각하게 된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대내외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해 고발되었고, 페롱 신부는 프랑스로 소환되었다가 인도의 퐁디세리로 전임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쇄국이 더욱 강화되는 한편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령이 다시 내려졌다. 전국적으로 확대된 박해로 251명의 신자가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특히 내포 일대의 해미와 홍주 관아에서는 수십 명의 신도들이 생매장에 처해지는 등 비법적인 대량 학살이 잇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