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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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秋史體-完成, 金正喜 |
이칭/별칭 | 추사,추사체,완당,김정희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노재준 |
[정의]
김정희는 예산에서 태어나 추사체를 창조한 조선 후기 최고의 예술가이자 뛰어난 학자이다.
[개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조선 후기 예산에서 출생하여 추사체라는 자신만의 서체를 창조한 예술가이자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이다.
김정희는 1786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나 1856년 말년에는 과천에서 생활하다 사망하였다. 김정희의 묘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서화가로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에까지 예명을 날렸으며, 글씨에 있어서는 고금의 금석문을 깊게 연구하여 자신만의 개성 있는 서체인 추사체(秋史體)를 성립하였다.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는 평에 맞게 불교와 유교, 문자학, 고증학, 금석학, 고고학, 실학, 시문학, 서화평론 등 여러 분야에 일가를 이룬 학자이다.
[가계와 벼슬]
김정희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춘(元春)이다.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이 대표적이고 소봉래(小蓬萊), 승련(勝蓮), 승설(勝雪), 삼십육구초당(三十六鷗草堂), 노과(老果), 칠십일과(七十一果) 등 수백 개의 별호를 사용하였다.
김정희는 아버지 김노경(金魯敬)과 어머니 기계(杞溪) 유씨(兪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노경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진 김한신(金漢藎)의 손자이다. 김정희는 큰아버지인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가 월성위 집안의 대를 이었다.
김정희는 1809년에 생원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181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823년에 규장각대교, 1826년에 충청우도암행어사, 1836년에 성균관대사성에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 1839년에는 형조참판에 이어 1840년에는 유배되기 전까지 동지부사를 지냈다.
[출생과 아동기]
김정희의 출생과 관련하여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전한다. 하나는 어머니 기계 유씨가 회임한 지 24개월만에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김정희가 태어날 무렵 향저의 뒤뜰 우물물이 말라 버려 뒷산인 오석산(烏石山)과 조종산(祖宗山)인 팔봉산(八峯山)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 샘이 솟고 초목이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는 이야기이다.
여섯 살과 일곱 살 때에는 입춘첩(立春帖)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전한다. 김정희는 신동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일찍 글을 깨우쳐 여섯 살 때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글씨를 써서 대문에 붙일 정도였다. 하루는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가 지나다가 이 글씨를 보고 김정희의 아버지을 찾아가 만나서는 “이 아이는 앞으로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만하니 제가 가르쳐서 성취시키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정희는 박제가의 제자가 된다.
입춘첩과 관련한 다른 이야기가 강효석(姜斅錫)이 1926년에 엮은『대동기문(大東奇聞)』에도 실려 전한다. 김정희가 일곱 살 때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지나가다 이것을 보고 들어와 누구 집이냐고 물으니 참판 김노경의 집이라 했다. 본래 채제공과 김노경 집안은 남인과 노론이어서 교유가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특별히 방문하니 김노경은 깜짝 놀라 “각하, 어이해서 소인의 집을 찾아주셨습니까.”하니, 채제공이 “대문에 붙인 글씨는 누가 쓴 것이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김노경이 우리 집 아이의 글씨라고 대답하자, 채제공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명필(名筆)로서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요.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김정희의 출생과 입춘첩에 관하여 전하는 이야기들은 평범하지 않은 비범성과 함께 천재성을 말해 주고 있다.
[김정희의 성장기]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가 된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김정희는 1809년 24세에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연행(燕行) 전에 김정희는 여러 차례 연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스승 박제가로부터 청나라 학계에 대해 자세히 들어 알고 있었다. 연경에서 대학자인 옹방강(翁方綱)[1733~1818)과 완원(阮元)[1764~1849]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고,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翁樹崐)[1786~1815]과 제자 섭지선(葉志詵)[1779~1863] 등 연경 학계의 많은 학자들과 만났다. 그리고 주학년, 이정원, 서송 등 많은 학자들과도 교류를 하였다. 김정희를 만난 옹방강은 김정희의 학식에 감탄하여 ‘경술문장해동제일’로 인정하며 극찬을 하기도 하였다.
김정희가 연행했던 시기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으며, 금석학, 문자학, 음운학 등이 학문의 독립적인 분야로 발전하던 때였다. 특히 금석학이 큰 진전을 이루었다. 옹방강의 석묵서루(石墨書樓)와 완원의 태화쌍비지관(泰和雙碑之館)에 수장된 많은 금석 탁본과 법첩(法帖) 등의 자료는 김정희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1809년 10월 28일 서울을 출발하여 이듬해 3월 귀국하기까지 연경에서의 활발한 지적 교류는 김정희가 예술과 학문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영역을 이루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학예의 연찬과 추사체 창조]
연경에서 학자들과 만나서 교류한 것은 김정희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그중 사제의 연을 맺은 옹방강과 완원은 김정희가 학문과 예술을 연찬함에 있어 큰 물줄기를 형성했다. 당시 청나라 연경 학계에서 경학과 금석학의 대가이자 대수장가로 서화 감식에 뛰어났던 옹방강과의 학연은 먼저 서체에 반영되었다. 김정희는 연행 이후 청년기에는 특히 예서와 해서(楷書), 그리고 행서에 있어 옹방강의 서체를 구사하였다.
옹방강과 마찬가지로 금석학과 서화 감식, 경학에 뛰어났던 완원도 김정희에게는 새로운 학예의 길을 가게 한다. 완원이 주장한 남북서파론(南北書波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은 김정희의 학서(學書) 방향에 새로운 전기가 된다. 완원의 주장을 수용한 김정희는 특히 한예(漢隸)에 대한 자신만의 학서 철학을 정립한다. 수많은 한예의 비문을 임모하고 연찬하는 것은 추사체를 이루는 계기가 된다.
청년기에는 옹방강의 영향을 받아 옹방강체를 썼지만 김정희는 옹방강 이전의 고예(古隸)와 한예(漢隸),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 구양순(歐陽詢), 조맹부(趙孟頫), 소식(蘇軾) 등의 금석문과 법첩을 두루 섭렵하고 서체를 깊게 연구하였다.
귀국 이후에도 연경학계의 학자들과 지속적인 금석 탁본 등의 금석문 자료를 교유를 하며 학문과 예술에 있어 큰 발전을 이루어 간다. 글씨에서는 ‘팔뚝 안의 삼백구비(三百九碑)[『한예자원』에 수록된 한비의 총수]’를 구비해야 한다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추사는 수많은 한예(漢隸)의 금석문 자료를 연구하면서 글씨에 정진하였다. 청장년을 거치면서 옹방강의 글씨체로부터 벗어나 김정희는 서예가이자 금석학자로 자신만의 서체인 추사체를 창조한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경지를 이룩한 것이다.
김정희의 글씨는 모든 서체에 뛰어났으면서도, 전서(篆書)를 혼융한 예서 글씨에 특장이 있다. 김정희의 예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글씨에서는 ‘팔뚝 안의 삼백구비’를 구비해야 한다고 한 것과 “예서 쓰는 법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가 없다. 가슴 속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한 가슴 속에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팔뚝 아래와 손가락 끝에서 발현되지 않는다. 또한 심상한 해서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 속에 먼저 문자향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법의 근본이며 예서를 잘 쓰는 비결이 된다.”라는 글에서 확인된다.
서예와 금석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김정희가 자신만의 추사체를 창조한 것은 금석문과 법첩을 깊게 연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연경에서 많은 금석문 자료를 접한 김정희는 자신만의 글씨체인 추사체를 창조함과 더불어 조선의 금석학에도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다. 1817년 북한산 비봉(碑峰)에 올라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를 확인하고, 68자를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1782~1850]과 자세히 조사하여 확정함으로써 조선 금석학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황초령 순수비와 ‘화정국사비’, ‘문무왕비’, ‘무장사비’등의 많은 비석을 발굴하고 고증하기도 하였다. 김정희는 북한산과 황초령에 있던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를 고증하여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 수록]을 저술하였다. 또한 ‘평백제비’, ‘당유인원비’, ‘경주문무왕비’, ‘진주진감선사비’, ‘문경지증대사비’, ‘진경대사비’, ‘경주무장사비’ 등 모두 7종의 비문을 연구한 금석학 연구서인 『해동비고(海東碑考)』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금석학에 대한 열기는 청나라 학자와의 금석문 자료 교류로 이어졌고, 그 열기는 청나라 학자에 의해 조선의 금석문에 대한 저술이 나오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김정희와 동갑내기인 옹수곤은 김정희 이외에 해거재 홍현주, 자하 신위, 정벽 유최관 등 여러 조선 학자들에게서 받은 금석 탁본을 통해 비문을 판독하고 평가한 『해동금석영기(海東金石零記)』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학자 유희해는 김정희와 아우 김명희(金命喜), 조인영이 보내준 조선의 금석문을 모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편찬하였다. 조선에서는 조인영이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를 쓰기도 하였다.
이렇게 당시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의한 고증금석학의 영향으로 김정희는 조선 고증학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과 청나라의 수많은 비석 탁본 등의 금석문 자료와 법첩(法帖) 등을 수집하여 연구하고 섭렵함으로써 청장년기 이후에는 옹방강의 글씨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신만의 서체를 창조한 것이다.
1840년부터 1848년까지의 9년에 가까운 제주도 유배와 1851년에서부터 1852년까지의 1년여의 북청 유배는 김정희의 글씨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과천에서의 말년 생활은 추사체를 완숙하게 하였다.
김정희가 자신만의 추사체를 창조하기까지는 천재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김정희가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갈아 뚫었고, 천 자루의 붓을 닳아 없앴다[磨穿十硏禿首千毫]”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 혹독한 수련을 거쳤기에 자신만의 예술 창조가 가능했던 것이다.
[문인화]
김정희는 그림에 있어, 사물을 사실 그대로 그리는 형사(形寫)가 아니라 자기의 사상이나 철학 등 내면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사의성(寫意性)을 중시하는 남종문인화를 추구하였다.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시(詩)·서(書)·화(畵)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한 것으로 글씨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문자향서권기를 강조하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이다.
김정희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한 화목은 묵란(墨蘭)이다. 그래서 묵란은 김정희의 그림 중 주류를 이룬다. 김정희는 “난을 치는 법은 또한 예서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서권기가 있은 다음에야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난을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칙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린다. 만일 그림 그리는 법칙을 쓰려면 일필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蘭法亦與隷近必有文字香書卷氣然後可得且蘭法最忌畵法若有畵法一筆不作可也).”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 난초를 그릴 때에도 예서 쓰는 법으로 그릴 것을 강조하였다. 난을 칠 때에도 예서 쓰는 법처럼 해야 하고 문자향서권기가 있은 후에야 난초를 잘 그릴 수 있으며, 화법(畫法)에 따라 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묵란의 대표적인 작품이 「불이선란도」이다. 「불이선란도」는 김정희의 그림으로는 현전하는 최후의 작품으로, 시서화각(詩書畵刻), 유불선(儒佛仙), 문사철(文史哲)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어 김정희의 철학을 오롯이 보여 주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 기자(奇字)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는가?”라고 한 화제에서 난초를 그림에 있어 김정희의 철학이 드러나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난맹첩(蘭盟帖)」은 묵란의 다양한 형태와 구도의 묘미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모두 15점의 묵란으로 이루어졌는데 말미에 난초 치는 것을 배운 지 30년이 되어서야 송나라의 정사초(鄭思肖)와 조맹견(趙孟堅), 명나라의 진원소(陳元素), 주도제(朱道濟), 서위(徐渭) 청나라의 정섭(鄭燮)과 전재(錢載) 등의 그림을 보았으나 전혀 방불치 않음을 언급하고 있어 이 분야에 기울인 열정과 묵란의 연원을 헤아리게 한다. 또한 묵란으로는 “난초를 칠 때는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생각을 진실하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라고 아들에게 주는 글이 실린 「불기심란(不欺心蘭)」이 있다. 이외에도 1848년에 권돈인에게 그려준 「증번상촌장묵란(贈樊上村莊墨蘭)」이 있다.
[추사파의 형성]
김정희는 명문 사대부 출신이지만, 신분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김정희의 제자는 사대부에서 중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권돈인, 이하응, 조면호, 신관호를 비롯한 사대부를 비롯하여 이상적, 김석준 등의 역관, 허련, 전기 등의 중인들도 많았다. 김정희로부터 화평을 받고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 수록된 김수철, 이한철, 박인석, 유숙, 조중묵, 유재소 등의 중인들도 제자들이다. 이들은 이른바 추사파를 형성하여 글씨는 추사체를 본받았고, 그림에서는 형사보다는 사의를 존중하는 전형적인 남종화의 경지를 개척한 김정희의 회화 사상에 동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의 흐름을 이끌었다. 주요 추사파의 인물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권돈인(權敦仁)[1783~1859]은 호가 이재(彝齋),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김정희와 막역지우로 먼저 떠난 김정희를 위해 추사고택에 걸려 있는 「추사영실(秋史影室)」을 행서체로 쓰기도 하였고, 여덟 수의 「추모시」를 짓기도 하였다. 권돈인이 그린 「세한도(歲寒圖)」에 김정희가 글씨를 쓴 합작품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글씨는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흡사하게 썼다.
조희룡(趙熙龍)[1789~1866]은 호가 우봉(又峰), 호산(壺山)으로,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글씨는 김정희를 따랐으며,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다. 특히 조희룡의 작품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나 「홍매대련도(紅梅對聯圖)」에서 알 수 있듯 매화 그림은 자신만의 화풍을 이루어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중인·화가·승려·몰락양반 중 특이한 행적을 보인 인물을 기록한 『호산외사(壺山外史)』를 남기기도 하였다.
조면호(趙冕鎬)[1803~1887]는 호가 이당(怡堂), 옥수(玉垂)이고, 호조참판, 지의금부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김정희의 누이의 사위이자 제자이다. 김정희가 조면호에게 써 준 작품은 「청리래금첩(靑李來禽帖)」 행서 대련 등을 비롯하여 많다. 백부인 조기복(趙基復)의 묘표를 예서로 써 준 것도 있다. 시와 서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에 일가를 이루었다. 수석에 관한 시문을 쓴 『예석기(禮石記)』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상적(李尙迪)[1804~1865]은 역관을 지낸 집안 출신으로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이다. 온양군수와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역관으로 청나라에 12번이나 다녀왔다. 김정희의 제자로 제주 유배 때에도 청나라의 많은 책과 자료를 구해다 주어 「세한도」를 그려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상적은 시인으로 청나라 문인들에게도 명성을 얻어 청에서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시는 섬세하고 화려하여 사대부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헌종도 즐겨 읽어 『은송당집(恩誦堂集)』이라는 이름으로 편찬되기도 하였다.
허련(許鍊)[1809~1892]은 호가 소치(小癡)로, 후에 남종화의 시조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許維)로 개명하였다. 초년에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통하여 전통 화풍을 익히다 대둔사 초의 선사의 소개로 김정희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수업을 받았다.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 명성이 알려져 헌종을 알현하기도 하였다. 산수·모란·사군자·괴석·연꽃·노송·파초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다. 스승인 김정희가 사망한 후에는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하면서 그림에 몰두했다. 허련은 자서전인 『소치실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허련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과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建), 그리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이어져 현재 호남 화단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신관호(申觀浩)[1810~1884]는 호가 위당(威堂), 금당(琴堂)이며, 나중에 신헌(申櫶)으로 개명했다. 훈련대장, 병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강화도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조선의 대표로 참여했다. 근대적 군사제도 수립에 노력한 무인임에도 김정희에게 글씨와 학문을 배워 문무를 겸비하여 시와 서를 잘했다.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예서를 잘 썼다.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호가 석파(石坡)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봉해졌다. 역사의 전환기에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정치인이지만, 김정희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특히 묵란을 잘 그려 ‘석파란’이란 말을 들었으며, 김정희는 석파란을 우리나라 제일이라는 평을 하였다.
전기(田琦)[1825~1854]는 호가 고람(古藍)이다. 중인 출신으로 약재상을 하였고, 조희룡, 유재소, 유숙 등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김정희에게 서화를 배워 사의적인 문인화의 경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구사하였던 인물로 크게 촉망 받았으나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와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술과 작품]
김정희는 조선 금석학의 비조(鼻祖)라는 평가를 받는데, 금석학에 대한 저술로는 『예당금석과안록』 과 『해동비고』가 있다.
제자인 박혜백(朴蕙百)이 김정희의 인장을 생전에 모아 찍은 『완당인보(阮堂印譜)』를 남겼다. 사후에는 제자와 후손에 의해 김정희가 남긴 자료를 수습하여 저술이 간행되었다. 제자인 남병길(南秉吉)[1820~1869]에 의해 1867년 김정희의 시문을 수집한 『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와 편지를 모은 『완당척독(阮堂尺牘)』이 간행되었다. 『완당척독』은 우리 역사상 척독이 문집으로 간행된 최초의 사례라는 점과 함께 김정희 최초의 문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868년에는 남병길과 제자인 민규호(閔奎鎬)[1836~1878]에 의해 『완당집(阮堂集)』이 간행되었다.
1934년에는 김정희의 동생 김상희의 현손인 김익환이 앞서 간행된 『담연재시고』와 『완당척독』, 『완당집』을 종합하여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을 편찬하였다. 이 전집은 홍명희가 교정하여 10권 5책으로 출판한 것으로 서문에 김녕한과 정인보의 글이 실렸다.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국보 180호인 「세한도」[개인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기탁]를 비롯하여 「불이선란도」[개인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기탁], 「난맹첩(蘭盟帖)」[간송미술관 소장], 「지란병분(芝蘭竝芬)」[간송미술관 소장], 「증번상촌장란(贈樊上村庄蘭)」[개인 소장],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간송미술관 소장],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의 그림이 있다.
글씨로는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개인 소장],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선(茗禪)」[간송미술관 소장], 「신안구가(新安舊家)」[간송미술관 소장], 「침계(梣溪)」[간송미술관 소장], 「계산무진(溪山無盡)」[간송미술관 소장], 「사야(史野)」[간송미술관 소장], 「화법유장강만리 서세여고송일지(畵法有長江萬里 書勢如孤松一枝)」[간송미술관 소장],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 高會夫妻兒女孫)」[간송미술관 소장], 「차호명월성삼우 호공매화주일산(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간송미술관 소장], 「직성류궐하 수구만천동(直聲留闕下 秀句滿天東)」[간송미술관 소장], 「묵소거사자찬(默笑居士自讚)」[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호고유시수단갈 연경누일파음시(好古有時搜斷碣 硏經婁日罷吟詩」대련[삼성리움미술관 소장], 「죽로지실(竹爐之室)」[삼성리움미술관 소장], 「산숭해심(山崇海深)」[삼성리움미술관 소장], 「유천희해(遊天戱海)」[삼성리움미술관 소장], 「석노시첩(石砮詩帖)」[삼성리움미술관 소장], 「반담추수일방산 백엽연화십리향(半潭秋水一房山 百葉蓮花十里香)」 대련[삼성리움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썼다는 봉은사의 「판전(版殿)」이 최후의 글씨로 전한다.
[금석문]
예산 화암사 뒤안 바위에 새긴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시경(詩境)」이 남아 있고 근처에는 「소봉래(小蓬萊)」가 있다. 이외에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白坡大師碑)」, 「김성일묘갈(金聲鎰墓碣)」, 「정부인광산김씨지묘(貞夫人光山金氏之墓)」, 「김복규정려비(金福奎旌閭碑)」, 「김기종정려비(金箕種旌閭碑)」, 「숙인상산황씨지묘(淑人尙山黃氏之墓)」, 이위정기(以威亭記)」, 「차화정국사지비부(此和靜國師之碑跗)」, 「정문공김수근묘표음기(正文公金洙根墓表陰記)」 등의 금석문이 전한다. 그리고 1817년 32세에 쓴 「송석원(松石園)」은 사진으로만 전한다.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에 대한 평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실린 김정희의 졸기(卒記)에서 김정희의 삶과 예술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철종 7년[1856년] 10월10일 갑오. 전 참판 김정희가 졸하였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도사(圖史)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해서·전서·예서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었다. 간혹 순리대로 행하여 사람들이 시비 걸지 못하기도 하였다. 김정희의 둘째 동생 김명희와 더불어 훈지(壎篪)처럼 서로 화답하여 울연(蔚然)히 당세의 대가가 되었다. 조세(早歲)에는 영명을 드날렸으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서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귀양 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으니, 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갔음을 세상에서 간혹 송나라의 소식에게 견주기도 하였다.”
김정희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1808~1876]는 김정희의 글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추사체의 변천을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옹방강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와 미불(米芾)을 따르고 이북해(李北海)[당의 李邕]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 드디어는 구양수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 제주도 유배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구속 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현대의 한학자이자 서예가인 임창순(任昌淳)[1914~1999]은 「한국서예사에 있어서 추사체의 위치」라는 글에서 김정희 글씨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추사 글씨의 특징으로 김정희는 서법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당(唐)에서 남북조, 다시 위진(魏晉)에서 한예(漢隸)에 이르고 예(隸)의 근원이 전(篆)에서 왔다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마침내 완당은 예(隸)를 쓰기 시작하였고 동한(東漢)의 예서가 파임과 삐침으로 외형미가 두드러진 데에 불만을 가지고 다시 서한예(西漢隸)에서 본령을 찾으려 하였다. (중략) 그러므로 완당의 임서는 옛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필법으로 쓴 것이다. (중략) 김정희의 작품은 점과 획의 운용이 강철 같은 힘을 가졌고, 공간 포치에 대한 구성은 모두 다 평범을 초월한 창의력이 넘친다. 그대로 현대회화와 공통되는 조형미를 갖추었으나 이는 과거의 어느 작가도 시도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경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