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종목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蒲谷面)에서 삼계리 주민 2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가 이끄는 시위대는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금어리(金魚里)로 진출하여 홍종욱(洪鍾煜) 형제가 이끄는 200...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병호는 1937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주로 중국 난징[南京]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포섭하거나 남경군관학교 생도들을 모집하는 등 지하활동을 하였다. 이 같은 활동을 하던 중 1944년 8월 15일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의 탐지를 받고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에 체포된 김병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년형을...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남은 일찍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遠三面)에서 황경준(黃敬俊)·김은수(金殷秀)·최상근(崔相根)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영달은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 황경준(黃敬俊)·김은수(金殷秀)·최상근(崔相根) 등과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다. 김영달은 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는 일제 경찰들이 시위 군중을 향하여 총을 발사함에도 불구하고 시위...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은수는 당시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 여인숙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모색하였다. 각지의 독립운동 소식을 주민들에게 전파하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던 가운데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주민들을 규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좌항리에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안명...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창연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주민들을 규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 등 200여 명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었다.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현수는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1909년 음력 3월 10일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소운동의 이재봉(李在鳳)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징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끌고 경기도 용인군 고석동(古石洞) 덕현(德峴)으로 가서 군자금 5원을 거두었다. 그 후 이익삼 의병장과 더불어 경기도 용인군 상동면 금현 김종옥(金鍾玉...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근영은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일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을 읽고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날 만세 시위에서 그는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을 지나 조선은행 옆까지 갔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다. 그는 조선독립선...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용환은 1919년 3·1운동 당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좌항리(佐恒里)에서 20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시위를 선도하였다. 시위대는 원삼면사무소까지 진출하여 그 곳에 모인 면민들과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이윤빈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갈월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지내던 중,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경기도 용인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1909년 11월 19일 동료 정기인(鄭基仁) 등과 함께 경기도 광주군 상동막리 이장 허성습(許性習)과 실촌면 상열미리 이장 강성유(姜性有)로...
-
일제강점기 용인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이은표는 1919년 3·1운동 당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주도하였다. 오전에 시작된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으며 밤에는 인근 구봉산·독조산·수정산 등지에서 봉화를 올...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이후 경기도 용인군을 근거지로 광주·죽산·양성 등지를 넘나들며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부하 30~40명과 함께 친일파에 대한 징치, 일본 경찰 습격, 빈민 구제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07년 11월 일시적으로 관(官)에 자수하였으나, 다시 봉기하여 활약하다가 1909년 6월에 다시 붙잡...
-
조선 말기 경기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진. 경기도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면서 8월에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주로 유격전으로 일제와 전투를 벌였으며, 그 밖에 일진회 등 친일파를 처단하거나, 빈민을...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인봉은 3·1운동 당시 김량공립보통학교에 재학하던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의 만세 시위는 모현 방면에서 용인 읍내 쪽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태극기를 릴레이식으로 전달해가는 시위대가 삼계리를 거쳐 금어리에 도착하자, 이인봉은 홍종욱(洪鐘煜)·홍종엽(洪鐘燁) 형제와 함께 태극기를 받들어 들고 내사면 대대...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인하는 1919년 3·1운동 당시 이은표(李殷杓)와 함께 시위를 계획하고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운집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밤에는 봉화 시위를 전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밤 10시경에 출동한 일본...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이하경은 경기도 양평군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08년 경기도 용인군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동료 6~7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위한 군자금 마련에 힘썼다. 그는 경기도 용인군 신원리(新院里)·자미리(自味里)·능동(陵洞) 등을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붙잡혀 3...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규복은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인근의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도 큰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고향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28일 아침부터 주민 수백 명을 이끌고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과 수여면을 돌면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기인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쇠래(釗來)에 이주해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7년 10월부터 이익삼 의병장 휘하로 들어가 동료 2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동(陵洞) 원촌(院村), 포곡면 둔전리, 수여면(水餘面) 방축리(防築里), 수여면 김량장, 하동면(下東面) 삼배위(三倍尉), 포곡면 두계위리(杜溪尉里), 광주군 상...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원경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으로 이주해온 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8년 3월경부터 이익삼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김장옥·정기인 등 20여 명과 같이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김량장리, 하동면 삼배위(三倍尉)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1910년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정주원(鄭周源)[1870~1908]은 죽산군(竹山郡) 원삼면(遠三面) 하수리(荷壽里) 사람이다. 그는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8월에 떨쳐 일어나 의병에 참여하였다. 정주원은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양지·양성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150여 명의 의병부대를 갖추고 의병장이 되었다. 정주원은 190...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철화가 처음 의병을 일으킨 것은 1905년이었으나,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국군의 강제 해산을 계기로 방인관(方仁觀) 의병부대에 가담하면서부터이다. 이전의 의병 활동 경험으로 곧바로 간부직인 서기를 맡아 의병 14명을 이끌고 경기도 여주군 이모산(二毛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또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
1896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경기도 용인 지역에 일어났던 의병 항쟁.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을 도발하면서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갑오개혁을 추진하면서 내정간섭을 감행하는 양면 전략으로 한국 침략을 강화하였다. 즉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침략을 강화하자 극동에 진출해 있던 러시아를 비롯한...
-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경기도 용인 지역에 일어났던 의병 항쟁.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시켰으며, 5월 말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905년 들어 일본은 청과의 봉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골화시켜 11월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은 한국의 외교...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상근은 1919년 3·1운동 당시 황경준(黃敬俊)·안명옥(安明玉)·김은수(金殷秀)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사무소 앞에 모인 수많은 면민들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시위대는 원삼면사무소와 문촌·고양리 등을 돌면서 크게 불어났다.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어 인근 산에 봉화를 올리며 야간 시위를 벌...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홍종엽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형 홍종욱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달 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홍종욱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동생 홍종엽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해 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시위 행진을 전개하다가...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경준은 1919년 3월 21일 이봉현(李鳳鉉)·김영달(金永達)·김성남(金性男)·이은표(李殷杓)·이용환(李容煥)·최상근(崔相根)·안명옥(安明玉)·김은수(金殷秀)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산봉우리마다 봉화를 올리는 등 준비를 갖춘 후 이 날 새벽 횃불을 들고 주민 200여...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황명운은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정주원(鄭周源)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그가 참가한 정주원 의병부대는 1907년 8월에 거의하여 용인·죽산·안성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배를 타고 충청남도 당진·서산 등지에까지 진출하면서 대일 항전을 하였다. 이같이 활발한 활동을 하던 의병부대는 1908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