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주원은 대한제국의 군부 경리국 제1과장 3등 감독을 역임하였으며, 황해도 연안군과 전라남도 옥과군의 군수를 지내는 고위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중국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 등지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다가, 1915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오산(午山), 이명(異名)은 남영득(南英得, 南寧得)이다. 남정각은 1913년 3월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중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수원·안성·용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배부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만세...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한말의 의병장 오인수(吳寅秀)이다.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서로군정서 별동대장을 거쳐 경비대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청산리대첩 이후 독립군들이 노령으로 이동할 때 조직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의선은 1919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 2·8독립선언이 있자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그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기도 대표 신석우(申錫雨)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원이 되었으며,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 세칙제정위원회 위원, 예산결산위원장 등에 선임되어 활...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덕수(德水). 일명 방(芳)·윤봉조(尹鳳朝), 자는 만위(晩瑋), 호는 춘호(春湖)·한정(漢汀)·법명(法明). 아버지는 이종백(李種百)의 아들로 이현(李賢)에게 입양되었다. 이정열은 천석꾼의 부자로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던 강태동(姜...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일영은 1900년 통신사(通信司) 전화과(電話課) 주사, 1904년 환구단(圜丘壇) 사제서령(祀祭署令), 봉상사(奉常司) 주사 등을 지내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후 해임되었다. 일제강점 후 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의 성낙형(成樂馨)·김주원(金胄元) 등과 연결되어 고종의 해외 망명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박봉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