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김제백과

김제(金堤)와 한첩목아(韓帖木兒)
  • 작성자
    민**
  • 작성일
    2010-07-15
  • 구분
    기사투고
  • 분야
    역사 > 전통 시대
  • 유형
    인물 > 인물(일반)
  •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 지역
    김제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하였던가.

한 고을의 읍격이나 승강 부침도 역시 출신 인사의 현우귀천(賢愚貴賤)에 따라서 좌우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입국한 임금을 낸 윗대 조상의 터이거나 혹은 왕비가 난 곳의 관향은 당연히 근동의 수읍인 목(牧)이나 부(府)가 되기 십상이요. 강상(綱常) 죄인이 난 큰 고을도 역시 군(郡)이나 현(縣)으로 강등되거나 아예 폐읍폐현(廢邑廢縣)이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바로 복현(復縣)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어찌 태어나고 자랐으며 선대의 조상이 계신 고향을 그리고 높이려는 생각과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무릇 타향에 나가 고향을 그리워하고 다른 나라에 가서는 고국을 배나 연모하게 됨은 모두가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것이다.

김제(金堤)와 관련하여『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열람하니 고려 인종(仁宗) 때 현령을 두었다가 ‘본조 태종(太宗) 3년 계미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한첩목아(韓帖木兒)가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다가, 사신이 되어 본국에 돌아와서 본향(本鄕)을 승격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本朝太宗三年癸未, 以縣人宦者韓帖木兒入侍天朝, 奉使至國, 請爲本鄕加官號, 故陞爲知郡事)’ 고 한다.

이로써 우리는 김제 출신이었던 한첩목아의 소청과 조정의 결단과 배려에 따라 김제현이 김제군으로 읍호가 승격되었음을 알 수가 있으니 사람의 비중과 역할에 따라 바로 군현의 변화가 초래된 연혁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실록이 편찬된 2백 년 후의 기록인『여지도서(輿地圖書)』(1765)의 건치 연혁 조에서는 ‘대명 환자인 한첩목아의 청으로 승격하여 군이 되었다(大明宦者 韓帖木兒之請 陞爲郡)’고 서술되었고 이어 김제 사람들의 풍속과 인심에 관하여서는 ‘선비와 백성들의 심성이 순박하고 도타운(士民醇厚)’ 곳이었다고 쓰여져 있다.

태종실록 가운데 57개의 기사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중국 사신 한첩목아 위인의 무례와 방자함과 황제의 위엄을 빌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분수 밖의 몰염치야 굳이 말하여 무엇하랴.
태종도 역시 그런 저급한 사신들의 행태에 귀찮아하고 꺼리는 기색이 역력한 것이 그대로 실록에 드러나 있다. 제계가 있다거나 몸이 아프다는 등의 사유를 대면서 가급적 접견을 피하고 싶어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 고향에 대한 넘치는 애향의 정과 마음만은 지극한 것이어서 김제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니 그 공이 실로 작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한첩목아의 사신으로서의 행지와 국왕과 조정의 접대와 관련한 사례 몇 가지를 더 읽어보기로 하자. 먼저 같이 사행왔던 동료인 황엄(黃儼)의 추례한 속내를 들여다보자.

‘임금이 사신에게 옷[衣]·모자[帽]와 신[靴]을 주었는데, 엄만은 받지 않았다. 엄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곳에 사신으로 왔던 자가 모두 연소(年少)한 무리들이어서, 주색(酒色)에 빠져 조정을 욕되게 하였기 때문에, 지금 늙은 신하를 보낸 것입니다.”

하였다. 수염과 귀밑 털이 모두 희었었다. 엄이 옷과 모자가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또 항상 말하기를,

“국왕께서 어찌 내구마(內廐馬) 한두 필을 주지 않을라구? 노왕(老王)과 병든 왕께서도 어찌 말 한 필씩을 아니 주겠나? 그러면 네 필이 되겠지!”

하고, 도리어 통사(通士)에게 이르기를,

“이 말을 내지 말라.”
하였으니, 실상은 말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上贈使臣衣帽及靴, 唯居任不受。 居任曰: “向者使于此者, 皆年少之輩, 沈於酒色, 以辱朝廷, 故今使老臣也。” 其鬚?盡白。 儼以衣帽不盡美少之, 且常言: “國王豈不與廐馬一二匹? 老王與病王豈不各與馬一匹乎? 則四馬矣。” 反謂通事曰: “毋出此言。” 其實欲使言之也。태종 3년 4월 13일).’

다음은 고향을 방문하는 사신들을 위한 국왕의 배려이다.

‘주윤단(朱允端)과 한첩목아(韓帖木兒)가 친척(親戚)을 방문하고 선묘(先墓)에 참배키 위하여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금이 편치 못하여, 대언(代言)과 의정부(議政府)를 보내어 문밖에서 전송하였다(允端、帖木兒以訪親戚拜先墳還其鄕, 上以不豫, 遣代言與議政府, 餞于門外。태종 3년 4월 17일).’

다녀오게 되면 국왕이 또 직접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어 준다. 아마 이때의 분위기를 틈타 사신 2인은 작정하고 자기들의 출신지인 고향에 대하여 읍호의 승격을 앙청하였을 것이다. 

‘임금이 주윤단(朱允端)·한첩목아(韓帖木兒)를 숭인문(崇仁門) 밖에서 맞아 위로하였으니, 윤단 등이 그 고향에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上迎慰朱允端、韓帖木兒于崇仁門外。允端等回自其鄕。태종 3년 5월 23일).’

그로부터 1주일 후 조정은 마침내 두 사신의 관향에 대하여 읍호를 승격하는 조치를 취한다

‘임주군(林州郡)을 승격하여 부관(府官)을 삼고, 김제현(金堤縣)을 승격하여 지관(知官)을 삼았으니, 임주는 주윤단(朱允端)의 고향이요, 김제는 한첩목아(韓帖木兒)의 고향이므로, 그 청을 따른 것이었다(陞林州郡爲府官, 金堤縣爲知官。 林州, 朱允端之鄕; 金堤, 韓帖木兒之鄕, 從其請也。태종 3년 5월 30일).’

이해 4월에 왔다가 6월에 돌아간 한첩목아는 수완이 좋았던지 재미를 붙여서였던지 또 다시 11월에 사신으로 나온다. 이번에는 황실에서 부릴 내시들을 우리나라에서 데려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이다.   

‘조정 사신(朝廷使臣) 한첩목아(韓帖木兒)와 고향에 돌아오는 환관(宦官) 주윤단(朱允端)이 왔는데, 나이 젊고 취기(臭氣)가 없는 화자(火者)261) 60명을 뽑아 보내라는 선유(宣諭)가 있었다. 임금이 교외(郊外)에 나가 맞아서 대궐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었다(朝廷使臣韓帖木兒, 與還鄕宦官朱允端來。 有宣諭, 選年少無臭氣火者六十名以遣。上郊迎, 至闕設宴。태종 3년 11월 1일).’

 한첩목아는 이듬해 4월 또 사신으로 나온다. 황제의 위엄에 가탁하여 조선 국왕을 끓어 않히고서 겨우 한다는 말이 '너네 나라 소 좀 팔아라!'는 하찮은 것이었으니 태종은 얼마나 노엽고 부애가 났을까? 의전상에 제대로 보좌를 못한 신하들에게도 역정을 냄이 또한 당연하였으리라! 그렇게까지 하여 이 나라가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선왕의 끼치신 덕이 장하지 않을꼬! 

‘임금이 사신을 서교(西郊)에서 맞이하였다. 막차(幕次)에 들어가서 사신을 기다리다가 사신이 장차 이르매 장막(帳幕) 밖에 나와 서 있었다. 사신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사람을 시켜 임금에게 빨리 말에 오르라고 고하니, 임금이 좋지 않은 기색이 있었다. 대궐에 이르러 사신과 더불어 전상(殿上)에 오르니, 사신이 좌우를 물리치고 임금을 꿇어앉게 하고, 오수(?修)가 높은 소리로 소를 산다는 자문[買牛咨文]을 외었다. 임금이 듣고 다시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것은 자문(咨文)이니 내가 친히 보겠소.”

하니, 오수가 곧 자문을 임금에게 주었다. 한첩목아(韓帖木兒)가 짧은 종이[短楮]를 임금에게 주었는데, 고황제(高皇帝) 때에 나온 화자(火者)의 성명을 쓴 것이었다. 임금이 모두 보고 예(禮)를 행하여 마치었다. 나와서 경연청(經筵廳)에 좌기하여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일은 불편하였다. 비록 조서(詔書)를 받든 사신(使臣)이라도 모두 나를 보고 말에서 내리어, 그 예(禮)가 매우 공손하였는데, 이 사람들은 다만 자문(咨文)뿐인데도 나를 보고 말에서 내리지 않고, 사람을 시켜 말에 오르라고 고하였다. 경들은 어째서 나를 장막 밖에 나가서 보게 하였는가?”

하였다. 박석명(朴錫命)이 대답하기를,

“신은 생각하기를, 비록 조서(詔書)를 받든 사신이라도 모두 말에서 내렸으므로, 이 무리들도 반드시 말에서 내릴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수의 속임수가 심하다. 좌우를 물리치기에, 내 생각에 밀지(密旨)가 있는가 하였더니 매우(買牛)의 자문(咨文)을 외었다.”

하고, 또

“황제가 청구하는 것이 많다.”

하였다. 김과(金科)가 말하기를,

“예전에 천왕(天王)이 부의(賻儀)를 구하고 수레[車]를 구하고 금(金)을 구하였는데, 《춘추(春秋)》에서 그르게 여기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利)로 교역(交易)하는 것이다(上迎使臣于西郊, 入幕次以待, 使臣將至, 出帳外立, 使臣不下馬, 使人告上速上馬, 上有不豫色。 至闕, 與使臣升殿, 使臣屛左右, 令上?, (?修)〔?修〕高聲誦買牛咨文。 上聞之, 還起曰: “此乃咨文也, 予將親見之。” 修卽以咨文授上。 韓帖木兒以短楮授上, 乃書高皇帝時出來火者姓名, 上皆覽之。 行禮畢, 出御經筵廳, 謂近臣曰: “今日之事不便。 雖奉詔使臣, 皆見予而下馬, 其禮甚恭。 此人等但咨文耳, 見予而不下馬, 使人告上馬。 卿等奈何使予出帳外見之?” 錫命對曰: “臣愚以爲雖奉詔使臣, 皆下馬, 此輩亦必下馬。” 上曰: “甚矣, (?修)〔?修〕譎也! 使屛左右, 予以爲有密旨, 乃誦買牛咨文, 又言帝多所求。” 金科曰: “昔天王求賻求車求金, 《春秋》非之。” 上曰: “此非特求也, 乃以利易之也。태종 4년 4월 4일).” ’

한첩목아를 나가서 맞이하여 잔치를 열어주고 다례(茶禮)를 베풀고 여러 가지 선물을 주고 보낼 때는 환송 잔치를 열어주고...

한첩목아는 3년 후에 다시 사신으로 나와 고향인 김제를 한 번 더 방문한다. 역시 가고 올 때마다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의정부가 동원되어 전송하고 맞이한다. 김제군의 수령이하 사민들의 환영과 접대가 어떠하였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시속에 '사내 대장부 뜻을 세워 고향을 등진 뒤에 성공하지 못하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으리라(男兒立志出鄕關 學若不成死不還)'는 말이 있으니 한첩목아로서는 여실한 증명이었던가. 다시 고향을 찾은 그의 자부와 긍지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만 하다.  

 ‘한첩목아(韓帖木兒)가 김제군(金堤郡)에 갔으니, 관향(貫鄕)인 때문이었다. 서천군(西川君) 한상경(韓尙敬)이 반행(伴行)하고, 의정부(議政府)가 한강(漢江)에서 전송하였다(韓帖木兒如金堤郡。 以鄕貫也。 西川君韓尙敬伴行, 議政府餞之于漢江。태종 7년 8월 21일).'

조선시대 대국의 칙사(勅使)앞에서 그렇게 쩔쩔매었던 이유는 이소사대(以小事大)하던 약소국의 설움과 굴욕이기도 한 동시에 나름의 생존과 실리를 추구한 외교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적어도 조선은 5백여 년 동안 청의 정묘ㆍ병자년의 두 번에 걸친 대륙으로부터의 침구(侵寇) 외에는 장기간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긴 이때로부터 약 2백 년 후의 ‘재조지은(再造之恩)’까지를 말한다면 자존심을 평화와 바꾸었다고나 해야할런지.

어쨌든 역시 오늘날도 분명한 국력의 시대이고 나아가 문화의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에 백범 선생이 말씀하신 도덕과 윤리가 꽃을 피우는 국가라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