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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부 소재 서원 및 향현사 성책 저산서원에 기록된 유지강, 유지기 선생의 이야기
  • 작성자
    이**
  • 작성일
    2013-12-02
  • 구분
    승인기사
전주부 소재 서원 및 향현사 성책 저산서원 편에 유지강 선생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이를 번역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전주부 소재 서원 및 항현사 성책
 
예조 존안
 
서기 1868년 (고종5년)
 
저산사우(楮山祠宇)
 
- 중략-
 
별암당(鱉巖堂) 유(柳)선생이 돌아가시니,[癸丑年 1553년 출생] 휘(諱)는 지강(之綱)이고, 자(字)는 백거(伯擧)이며, 시조(始祖) 장령공 휘(諱) 습(濕)은 완산백(完山伯:완산=전주)에 봉하여졌으며, 자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배(配)는 전주최씨 이시고 다섯 아들과 한 분의 사위(심효생)를 두었는데, 모두들 과거에 급제하여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호를 받았으며, 막내아들은 생원 문과이신 휘(諱) 극거(克渠)이시고, 관직은 호조판서이시니, 즉 공의 7 대조이시다.대대로 벼슬을 이어 세습함은 가정의 가르침이 있음이며, 공의 덕기는 순수하고 성품은 강명하여 어릴 때 우뚝한 거인의 뜻과 같이 홀연하였다. 마치 학이 닭 무리 중에 있는 것 같고 오동에 난세가 앉은 것 같았다.매양 사마광이 독을 깨어 친구를 구한 듯한 지혜가 있었고, 조금 자라서는 율곡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약관의 나이로 사문숙성하여 호남과 영남의 이재를 겨루는데 연천삼장하였으며, 사계 김장생 선생 문하에 입문 사문의 난해를 즐거움과 유익하게 탐구하여, 같은 처사 중에 학행이 고명한 죽헌을 벗삼는 지기가 되었다.정여립이 허명으로 몰래 조야를 경통하니, 공은 한번 보고 그가 허식에 의한 역모임을 알고 단교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라고 감복하였다. 공은 본성이 효우정성 하여 충성과 봉양의 의절은 한결같이 소학을 준수하니 사림의 표준이 되어 방백(관찰사)이 효행청렴으로 천거하였다.선조조에 북부참봉에 제수하니 세기대신들이 학문을 사랑하는 공은 장차 크게 쓰이리라 하였다. 공은 붕당이 극심한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독서와 제자를 가르치며 지방에 머무르던 중 정유년 왜구가 창궐하니, 백의창의하여 김제 땅에서 적의 무리를 물리쳤다. 만력병오 선조(宣祖) 39년(1606년) 오십사세. 오로지 경학에 뜻을 두고도 과거에는 힘쓰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명으로 사마시에 삼등으로 합격하였으며, 공의친족 춘호공 유영경(영의정)이 과거를 보아 청요직에 발탁됨을 권하였으나, 공은 공손이 사양하고 홀연히 고향으로 돌아와 전원생활 수년에 광해군이 왕이 되니 삼창(유희분, 박승종, 이이첨)이 전권을 잡았고, 칠신이 쫓겨났다.이때 감사 이경전이 향인과 체결하여 무뢰한 무리들을 이끌고 장차 간당과 부합하여 소의를 모아 외음계획을 삼아 일향장보를 위협하니 두렵고 실색하여 겁을 내어서 따랐다.공의 형제는 우뚝서서 굴하지 않고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니, 고을 동지 중 동의자 최석계, 김봉곡, 유조헌, 박매포(청하서원종향), 유춘포(화로), 김동계, 제현도 홀연이 지주가 되어 혹한의 잣나무와 같은 모든 호남의 선비들은 이에 의지하지 않고 난에 추종하지 않았다. 공은 운둔하여 시골에 살면서 송죽을 벗삼아 시를 읊으며 자적하고, 수석사암에 요완보하며 청풍명월에 스스로 회포를 풀었다. 공명과 부귀는 일장춘몽처럼 여기고, 망운계어로 사시의 경치를 보면서 호를 별암으로 짓고 제호로 삼아 편액하였다. 대게 석인에게 보여주는 고반(쟁반을 두드리며)을 즐긴다는 뜻이다. 만세력 신유년에 어머니가 향년 구십일세에 돌아가시니 공의 나이 육십구세요 늙었어도 어머니를 사모함이 젖을 잃은 어린애처럼 가슴을 치며 주야로 통곡하였고, 이에 시묘살이에서 병을 얻어 죽으니 효로서 일생을 마쳤다. 어찌 일향의 현사라고만 할까. 가이 백세의 사표일지어다.
 
정암(靜岩) 유선생 휘(諱) 지기(之紀)는 별암 선생의 아우이시다.공은 신기가 수려하며, 재기가 무리 중에서 뛰어나 연보 십육세에 예능하고, 학문에 진심하여 백석 유사부 즙이 한번 그 위의가 연정함을 보고, 연정이 말하기를 진실로 명세진유라 할만하다 그 당예제 하여 말하기를 정암이라 하였다. 공의 아버지 병이 있을 때 형과 더불어 뫼시면서 병석을 떠나지 않았으니 한 노인 의원이 말하기를 꿩의 알이 묘약이라고 하였다. 이 겨울에 구할 까닭이 없어 밤낮으로 축천하니 문득 꿩 한 마리가 알을 떨어뜨리고 갔다. 또한 부모상의 범절은 한결같이 예절을 따랐으며, 시묘 살이 3년 동안 제복을 벗지 않고 애통해 하였다.또 형의 상사에는 모든 장상이 예에 맞지 않음이 없었으며, 복을 벗은 후 병자년에 북쪽 오랑케가 침범하여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공은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에 파천함을 듣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면서 말하기를, 천도가 어찌하여 나라일이 어려움이 많은가. 지금 내가 살아서 부모에게 보답하지 못하고 죽어서 임금에게 보답하지 못함이니, 살아서 다시 무엇하리. 라고 맹세하고 가동을 거느리고 난에 달려가기 위하여 계룡산에 이르렀으나 강화가 성립됨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십여장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절의로서 생을 마치니 어찌하여 충효가 아울러 형제에서 나왔는가. 이는 곧 질풍에 굳센 풀이요, 세한에 송백이니, 예로부터 절의의 선비는 어찌 공과 같이 생을 버리고 의에 나감이 있을까. 비록 죽었다 한들 후회함이 없으리라.
창건도광 정해(1827년. 순조27년)
 

전주부 소재 서원 및 향현사 성책 표지
 

유지강 선생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