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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민간인 희생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505
한자 金堤民間人犧牲事件
영어의미역 Affair Sacrificed Gimje Civilians in Ideological Disput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인 희생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49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50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청하면
관련인물/단체 이석상|김윤철|김갑동|구인택|이덕봉|정봉열|공완봉|이영기|이판동|고병열|주만춘|최중식|양길남|강창업|최준식|송석철|김형배|김성두|하치호|권태술|김일천|정기봉|나백두|고순동|김두현|임정규|김기철|정판석|김이례|정태봉|정금주|김종한|장성진|강춘길|곽병일|이남근|최정열|유상덕|이정신|최남인|곽옥진|유금주|송은수|송창호|이옥진|대동청년단|독촉국민회|조선민족청년단|송영래|곽이주|김인두|임종철|김종택|조선청년동맹|민애당|남로당|대송교회|금산교회|대창교회|만경교회|최주일|조영호|윤성학|임종연|임종률

[정의]

1949년에서 1950년에 걸쳐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

[개설]

1949년 봄부터 1950년 사이 김제에서 좌익 단체에서 활동한 임종연, 임종률, 윤성학 등 민간인이 전라북도 경찰국에 의해 이송되었다가 실종되거나 살해되었다.

이후 1950년 7월 25일부터 9월 28일 사이 인민군 치하 및 치안 공백기에 백산면·감곡면·금구면·봉남면·금산면·김제읍·만경면 등지에서 이석상(李錫祥)을 비롯하여 기독교인이면서 우익단체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나 부유층ㆍ지주 및 그 가족에 대한 보복 행위로 최소 208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역사적 배경]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시작되고, 국내에서는 좌우 합작운동이 실패하면서 한반도에는 통일 민족 국가가 수립되지 못하고, 남한과 북한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남한에서는 국가 형성 과정에서 좌익 세력에 대한 배제와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관과 우익 청년단원 등으로부터 고통을 받아온 이들이 분노와 복수심을 품게 되었다.

김제 지역에서는 1947년 말부터 대동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조선민족청년단이 구성되어 기독교를 중심으로 우익 활동을 전개하였다. 반면 좌익들은 조선청년동맹·민애당·남로당 등 지하 조직을 통하여 미군정 및 우익과 대립하였다.

[발단]

1948년 분단을 획정하는 5.10선거 후 이후 민족공동체 형성의 희망이 좌초되고, 이승만 정권에 의한 극우반공체제가 강화되면서 전라북도 경찰국에 의해 좌익 성향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6.25전쟁 당시 벌어졌던 학살은 대부분의 경우 이념적 대립과 거리가 있었으며, 실제로는 좌ㆍ우익이 서로 주고받은 고통, 원한, 개인감정 등에 대한 보복 행위로 나타났다.

6.25전쟁 발발 후 군산·임피를 점령한 인민군 6보병사단과 이리를 점령한 4보병사단이 1950년 7월 19일 오후에 만경강에 진주하였다. 전라북도 경찰대와 김제경찰 병력은 변변한 교전도 없이 후퇴하였고, 김제 지역은 이튿날 북한군 15보병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날 이후 9월 중순경까지 정치보위부 산하의 치안 조직과 면·리 단위 인민위원회가 지방 좌익들의 도움을 받아 우익 인사와 기독교인을 통제하고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경과]

1. 좌익 희생 사건

김제시 봉남면 대송리에 거주하였던 윤성학이 1949년 3~4월경 청하면 청하지서 뒷담집에 거주하는 김명옥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가 청하지서에 연행되어 김제경찰서를 경유, 전라북도 경찰국으로 이송되었으나, 행방불명되었다.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였던 임종연이 1949년 봄 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북도 경찰국 유치장에 수용 중 1950년 살해되었고, 6.25전쟁 시 국군의 전주 지역 수복 후 임종률이 경찰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2. 우익 희생 사건

1950년 7월 25일에 조선경비대 12연대 군인 출신인 이석상[당시 22세]이 백산면 분주소 옆 소나무 아래에서 인민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어 7월 28일에는 통사동 숏턴재 입구 야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원이며 금산교회 집사인 김윤철(金允喆)[당시 26세]이 과거 마을 좌익 인사를 가해한 데 대한 보복으로 몽둥이로 타살되었으며, 김갑동(金甲童)·구인택(具仁澤)·이덕봉(李德奉)·정봉열(鄭奉烈)·공완봉(孔完奉)·이영기(李永基)·이판동(李判同)·고병열(高炳烈)·주만춘(周萬春)·최중식(崔重植)·양길남(梁吉男)·강창업(姜昌業) 등 12명이 함께 희생되었다.

다음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원 최준식(崔俊植)[당시 34세]과 금구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단장이며 금구면장인 송석철(宋錫喆)[당시 37세]이 지방 좌익의 밀고로 체포된 뒤 8월 2일에 금구면 대화리 금천부락 뒷산에서 인민군에 의해 총살되어 희생되었다. 고창경찰서 무장지서 주임과 성명 미상의 2명 등 3명이 이때 함께 희생되었다.

8월 26일에는 봉남면 대송교회 교인이며 대동청년단 부단장인 김형배(金亨培)[당시 28세], 대송교회 교인이며 대동청년단원인 하치호(河致鎬)[당시 27세], 조선경비대 익산 3연대 소속 이등상사로 병가 중에 있던 김성두(金成斗)[당시 23세]가 봉남면에 피신 중에 지방 좌익에게 붙잡혀서 심하게 고문당한 뒤 봉남면 신응리 종정장터 모래사장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생매장되었다. 이때 권태술(權泰述)·김일천(金日天)·정기봉(鄭基奉)·나백두(羅白斗)·고순동(高順同) 등 5명이 함께 희생되었다. 이튿날에는 금산교회 교인이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원인 지주 김두현(金斗玄)[당시 56세]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전황이 인민군에게 불리해져 김제에서 퇴각할 때에도 학살이 있었다. 9월 27일에는 일제강점기 때 김제경찰서 형사부장을 지냈고, 당시 영단[농협]에 다녔던 임정규(林廷圭)[당시 39세]가 김제내무서 길 건너 앞 야산 공터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살해되었다. 같은 날 만경면 분주소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지주였던 정판석(鄭判錫)[당시 52세]과 부인 김이례(金二禮)[당시 44세], 아들 정태봉(鄭泰奉)[당시 18세], 딸 정금주(鄭今柱)[당시 20세], 젖먹이 아이 2명 등 가족 6명이 만경면 분주소 내 우물과 방공호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때 만경교회 김종한 목사와 장성진·강춘길(姜春吉)·곽병일(郭炳一)·이남근(李南根)·최정열(崔正烈)·유상덕·이정신(李正新)·최남인(崔南寅)·곽옥진·유금주(柳錦柱)·송은숙(宋銀淑)·송창호(宋昌浩)·고순동(高順同)·이옥진(李玉振) 등 교인 15명이 함께 희생되었다. 만경면 분주소에서 희생된 총 인원은 최소 53명이었다. 그리고 9월 27일에서 28일 사이에 만경면 소토리 공동묘지와 만경면 화포리 창자마을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만경면 화포리 부유층 인사와 그 가족들 최소 65명이 살해되었다.

[현황]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6.25전쟁 시기 김제지역에서 좌익세력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을 접수·조사하여 백산면분주소 옆 소나무 아래 이석상 희생사건, 금산면 금산리 자택 김두현 희생사건, 금구면 대화리 금천부락 뒷산 희생사건, 감곡면 통사동 솟턴재 입구 야산 희생사건, 만경면분주소 희생사건, 봉남면 신응리 종정장터 희생사건, 김제내무서 앞 야산공토 희생사건 등 총 7건에 대해 2008년 11월 4일 진실 규명을 결정하였다.

한편 2010년 6월 30일 임종연, 임종률, 윤성학 등 좌익 인사 희생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결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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