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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 집성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716
한자 南平文氏集姓村
영어의미역 Nampyeong Mun Clan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 회룡리지도보기
집필자 김승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집성촌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 회룡리 동촌마을에 있는 남평 문씨 집성촌.

[개설]

남평문씨(南平文氏) 시조는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인 문다성(文多省)이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전라도 남평현 동쪽에 큰 연못이 있었고, 연못 바로 옆에 천 길이나 되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고을 수령이 그 바위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색 채운(彩雲)이 바위를 감싸면서 문득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이상하게 여긴 수령이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돌상자 속에 피부가 옥설(玉雪)과도 같이 맑고 용모가 준수한 어린아이가 들어 있었다. 수령이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5세에 문사에 저절로 통달하고 지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총기가 있는지라 성을 문(文)이라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이라 하였다고 한다.

문다성이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삼한벽상공신에 오르고 남평백에 봉해진 뒤 후손들이 남평을 관향으로 삼았으나 그 후 문헌이 실전되어 대수를 헤아리지 못하다가, 문공원(文公元)·문공유(文公裕) 형제의 묘지명에 의해 고려 숙종 때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낸 문익(文翼)을 중시조 1세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형성 및 변천]

남평문씨는 문다성을 시조로 하고 문극겸(文克謙)[1122~1189]의 후손들을 입향조로 하는 김제시 세거성씨 가운데 하나이다. 시조의 23세손 문극겸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덕병(德柄)이다. 아버지는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를 지낸 경정공(敬靖公) 문공유(文公裕)이다. 황주판관·합문지후(閤門祗候)·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이후 명종이 즉위하자 이의방(李義方)의 추천으로 우승선어사중승(右承宣御史中丞)이 되었고, 딸을 이의방의 아우 이인(李隣)에게 출가시켰다. 이후 대부소경(大府少卿)에 이어 예부시랑이 되었고, 1173년(명종 3) 예부시랑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180년(명종 10) 태자소사(太子少師)·수태위(守太尉),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가 되었다. 1185년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어 아상(亞相)이 되었으며, 다시 수국사(修國史)·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거쳐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문극겸의 후손 문달한(文達漢)은 찬성사를 지낸 문경(文璟)의 아들이다. 1388년(우왕 14) 양광경상도도체찰사(楊廣慶尙道都體察使)로서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후 문하평리·찬성사에 올랐다가 탐학(貪虐)이 심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합포(合浦)·철원(鐵原) 등지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공양왕 즉위 초에도 이임(李琳) 일파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고, 1392년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현황]

관련 유적으로 저산서원(楮山書院)이 있다. 1577년(선조 10)에 창건하였고, 1869년(고종 6)에 철폐되었다가 1904년 복원되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강당이 있다. 사당에는 충숙공 문극겸을 중심으로 하여 문달한, 충선공 문익점(文益漸), 명천 문찬과 전주유씨인 별암(鱉岩) 유지강(柳之綱), 정암(靜岩) 유지기(柳之紀) 등을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3.19 [현황] 수정 현황에 전주유씨 유지강, 유지기 관련 내용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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