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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843
한자 尹汝任
영어음역 Yun Yeoim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서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채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출신지 전라북도 김제시
성별
생년 1590년연표보기
몰년 1637년연표보기
본관 파평(坡平)
대표관직 상주영장

[정의]

조선 후기 김제 출신의 무신.

[개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이후 1636년(인조 14) 4월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이 왕자와 대신 그리고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는 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당시 척화의 분위기가 고조된 조선 조정이 이를 거부하자 태종이 재차 침입을 감행한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조선 조정은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하여 청군이 침입해서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서둘렀다. 14일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묘사(廟社)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도로 향하게 하고,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안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副使)로 정하여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훗날 효종], 인평대군을 배호하여 강화로 향하게 하였다.

또한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강화를 방비하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정했다. 그날 밤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良鐵坪)[마포대안으로 추정]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최명길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다시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밤늦게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성지(聖之), 호는 구봉(九峯).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의주의 용만관까지 국왕을 호종하였던 파릉군(坡陵君) 윤찬(尹巑)이다.

[활동사항]

윤여임(尹汝任)[1590~1637]은 19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내외의 무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사과(司果)로 한직에 머물렀다. 1622년(광해군 14) 훈련원첨정 이정배(李廷培)와 함께 조총(鳥銃)·환도(環刀)·대포(大砲)·화약 등을 만들어 포상받아 선전관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인 광주까지 달려갔지만 적병이 이미 교통을 차단한 상태였다. 이에 상주영장으로 휘하 군대와 함께 부전(赴戰)하였는데, 다음해 쌍령(雙嶺)전투에서 부장 권박(權璞), 김제 출신 수사(水使) 백선남(白善南), 병사 민영(閔泳), 허완(許浣),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 등과 더불어 종일토록 적과 전투를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야간을 이용한 적의 기습으로 백선남과 함께 전사하였다.

[상훈 및 추모]

왕이 명하여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가족에게 월봉을 지급하게 하였으며, 후일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원군(鈴原君)으로 추봉되었다.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청곡사백산면 하서리 백산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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