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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A020304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천수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강제적인 이주가 아닌 자발적인 이민의 경우 생존 경제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은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광활방조제를 막으며 개발된 간척지이다.

염기(鹽氣)[소금기]가 가득한 갯땅을 전국에서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염기를 제거하고 농사가 가능한 땅으로 만들었다. 해방 후 광활은 이민자들의 땅이 되었다.

1960년대 이후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농촌의 경제는 도시 경제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촌향도(移村向都) 현상이 전국적으로 나타났으며, 화양마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농지에 보리·딸기·감자 등을 2모작·3모작으로 경작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였고, 결국은 도시 근로자 이상의 경제적 부를 획득하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광활면은 김제시 17개 읍면에서 예금률이 가장 높다.

[감자 덕분에 돈이 많아]

“[광활면이 부유해지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로 봐야죠. 쌀도 전국서 제일 알아줬어요. 여기가 쌀 판매 전국 1위였어요. 전국 어디 쌀 안 들어간 곳이 없었어요, 제주도서 강원도까지. 그렇게 쌀 미질이 여기가 아주 좋아요. [간척지 땅이라] 철분이 살아 있다는 얘기죠. [광활] 쌀값도 높았고, 다른 작물로 주로 딸기, 감자를 많이 했죠. 1970년 중반부터 하기 시작했어요.”[박기영, 1948년생]

광활간척지에서 생산된 쌀은 미질이 좋아서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었고, 가격도 높게 받았다. 이러한 광활 쌀의 인기를 바탕으로 1970년대 중후반에 딸기, 감자 등의 상품 작물 재배를 시작하였다. 상품 작물이 성공하면서 광활 주민들의 수입이 더욱 증가하였고, 타지의 젊은이들도 농사를 짓기 위하여 광활로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광활은 1년에 감자로 들어온 게, 금년 같으면, 100억이 넘었어. 보통 60~70억은 들어왔거든. 여기 1년 소득이 농가 호수로 따지면 상당히 많여. 노인들은 못 허고 젊은 사람들만 많여. 그런게 농협 예금이 많다는 얘기가 젊은 사람들이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많은 거여. [예전에] 진봉농협, 광활농협을 합병을 할라고 했거든. 근디 광활농협에 예금이 많으니까 합병이 안 돼. 광활이 면적은 작지만 예금이 많아. 젊은 사람들이 예금을 많이 혀.”[이순구, 1931년생]

상품 작물의 수익률은 매우 높은 편이지만 그만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쌀과 상품 작물을 함께 짓는 젊은이들과 쌀농사만 주로 짓는 노인들 간의 소득차가 크게 난다. 젊은이들의 농업 소득은 저축으로 이어져 예금률이 김제 17개 읍면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김제에서 예금률이] 제일 낫지. [광활면 면적이] 적은 면이더래도 김제시 내(內)에서는 감자대, 뭔대 혀서 [예금률이] 최고 많디야. 전 [농협]조합장 하나는 예금이 좋아 갖고 상 탓대야, 군 조합에서. 원체 예금이 높아 가지고. 그러니까 지금 여기가 면은 3개리 20개 부락인데, 김제 17개 읍면에서 예금이 최고 많을 걸, 감자 때문에.”[조용환, 1935년생]

[정보제공]

  • •  이순구(남, 1931년생, 옥포리 화양1구 주민)
  • •  조용환(남, 1935년생, 옥포리 화양1구 이장 겸 노인회장)
  • •  박기영(남, 1948년생, 옥포리 화양1구 새마을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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