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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C010105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내촌마을
시대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선희

과거 내촌은 120여 호에 이르는 커다란 마을이었다. 해주오씨함양박씨의 집성촌이었다고도 전해 오지만, 현재 박씨와 오씨 성을 가진 가구는 10가구 정도에 불과하다. 지금 마을에서 제일 많이 살고 있는 성씨는 동래정씨다.

동래정씨가 마을에 들어온 것은 300~400년 전이다.

당시 마을에는 함양박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마을 내 대부분의 토지도 소유하고 있어서 부유한 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이 없었다고 한다. 자연히 집에 들어와 살 사윗감을 고를 수밖에 없었고, 인근 부량면 장화에 살고 있는 동래정씨 집안의 남자가 장가(丈家)를 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겉보리 서 말이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그럴까?

“시집살이하려면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해야 한다.”는 속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시집살이가 일반적인 혼인 형태로 인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만 해도 ‘장인 집에 들어가 산다[入丈家]’는 혼인 풍습이 있었다. 즉, 처가살이도 많았다는 것이다. 일례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도 친정집인 강릉에서 대부분의 세월을 살았다는 사실이 증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옛날에는 다 처가살이했어]

내촌마을도 다르지 않았다. 처가살이를 위해 처음 마을로 들어온 동래정씨가 박씨 가문의 재산도 물려받고, 제사도 지내며 자손을 낳고 대를 이어 살았다. 마을 어귀에 있는 동래정씨 선산은 정씨 일가의 불어난 세(勢)를 증명하고 있다.

동래정씨가 그러했듯이 동래정씨와의 혼인을 통해 전주이씨와 남원양씨가 마을로 들어왔다.

전주이씨인 이두영[1931년생] 할아버지는, “내 조부 때 마을로 이사 왔다고 혀. 조선 말기에 『정감록(鄭鑑錄)』 비결서(祕訣書)라고 있었어. 거기에 부안 일대에 큰 해일이 일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대. 그래서 해일 피하려고 땅이랑 다 놓고 할아버지가 동생, 그러니까 고모할머니가 살던 이 동네로 오게 된 거지.”라고 말했다.

당시 이두영 할아버지의 고모할머니가 내촌마을 동래정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 있었다. 그의 조부는 조선시대 민간에서 읽혀졌던 일종의 예언서인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부안군 백산면 금판리에서 내촌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남원양씨 양복춘[1935년생] 할아버지 역시 한국전쟁 때 마을에 살고 있던 고모 집으로 피난을 오면서 들어왔다고 한다.

양복춘 할아버지와 함께 피난 왔던 형제들 역시 내촌에 함께 살면서 남원양씨 일가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내촌마을 사람들은 혈촌(血村)이 되었다. 특정 성씨가 우월하게 많은 집성촌은 아니지만 혼인을 통해 한두 명씩 새로운 성씨가 정착해 살면서 실질적인 혈촌(血村)을 이루었던 것이다.

[정보제공]

  • •  이두영(남, 1931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웃몰 주민)
  • •  정인곤(남, 1932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큰뜸 주민)
  • •  양복춘(남, 1935년생, 홍산리 내촌마을 큰뜸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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