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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462
한자 高麗時代
영어의미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백덕규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김제 지역 역사.

[개설]

고려 전기는 실상 호족 시대의 후반기로, 왕조의 통치에 많은 한계가 있었다. 고려는 1018년(현종 9)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항구적인 지방통치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도 여러 제도가 시도되기는 하였지만, 이때 와서 모든 고을의 이름이 중국식 한자명으로 다시 바뀌었다. 바뀐 기준은 757년에 신라에서 정해져 일시적으로 쓰였던 것을 그대로 따르거나, 좀 더 중국식인 다른 용어로 바뀌었는데 김제 지방의 무읍(武邑)과 야서(野西)는 940년(태조 23)에 각각 부윤(富潤)거야(巨野)로 개칭되었고, 김제·만경·금구 등도 이 무렵부터 차차 공용화되기 시작하였다.

[행정구역 편제]

1018년 고려는 전국을 경기(京畿)와 12계수관도(界首官道)로 정연하게 나누는 지방통치 제도를 완비하였다. 이와 같은 편제 아래 김제 지방의 고을은 전주도에 속하였으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수령관이 되지는 못하였고 모두 다른 고을에 예속되었다. 즉 김제현·금구현·거야현·낙양현 등은 전주목의 임내였고, 만경현부윤현 등은 임피현의 임내였다. 이는 나말여초 호족 시대부터의 지방 세력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김제 지역이 전주와 임피의 두 세력에 의해 분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 고려시대 말까지 지속되었지만, 고려 중기 이후 많이 변천되었고 김제 지방도 그 기간에 변화가 있었다. 1170년(명종 즉위)에는 전주목의 임내였던 금구현이 현령관이 되었다. 금구는 전주 출신으로 무인정권의 실력자 가운데 하나였던 이의방(李義方)의 외향이었던 관계로, 그의 세력에 힘입어 수령이 배치될 수 있었다. 이처럼 고려 중기 이후에 김제 지역에서는 만경현·김제현·금구현이 차례로 현령관으로서 수령관이 되었고, 나머지 현과 부곡·소 등의 고을은 이들 3현에 임내로서 분할 예속되었다. 이러한 분립 상태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후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관련 유물 및 유적]

김제지역의 고려시대 문화유적으로는 금산사와 귀신사 경내의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여러 석조물들을 들 수 있다. 특히 보물 제 24호인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는 고려 예종 6년(111년)에 법상종의 대표적 고승인 혜덕왕사(1038~1095)의 생애를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비로서 고려의 승려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좋은 예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보물 제25호인 금산사 오층석탑은 정사각형으로 높이가 7.5m로서 비교적 큰편이나 소박한 모습을 띠고있으며 건립시기는 고려 초기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금산사 방등계단은 봉율사찰(奉聿寺刹)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유물로 수계법회(受戒法會)를 집행할 때 수계자를 이 단의 중앙에 앉히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않아서 계법을 전수하던 것이다. 그밖에 특이하면서 우와한 형태를 지닌 보물 제 27호 금산사 육각다층석탑과 보물 제828호인 금산사 석등이 있으며 심원암에는 보물 제29호인심원암 북강삼층석탑이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존되고 있으며, 귀신사에는 귀신사 석수와 청도리삼층석탑이 전라북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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