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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장터 독립만세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492
한자 院坪-獨立萬歲事件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at Wonpyeong Marketplac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창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3월 20일
발생(시작)장소 원평장터 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배세동|전도명(田道明)|전도근(田道根)|전부명(田富明)|이병섭(李秉燮)|김성수(金成受)|김대희(金大熙)

[정의]

1919년 3월 20일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이 조선에서 무단 통치를 실시하여, 조선인은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이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다양한 경로로 나타났다. 한편 국외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의 식민지를 처리하자고 주창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도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게다가 1919년 1월 21일 사망한 고종이 일제 독살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이 동요하였다.

2월 8일에는 일본 조선인 유학생들이 동경에 있는 조선 YMCA회관에 모여 독립 대회를 열었다. 이 사실이 국내에도 알려졌고, 이어 기독교·천주교·불교 관련 국내 명망가들이 연합하여 독립 선언 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애초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 선언 대회를 열기로 하였으나 충돌을 우려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파고다공원에서는 운집한 군중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후 독립만세 운동은 1919년 3월과 4월에 걸쳐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전주 등 인근 지역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흐름을 접한 원평 사람들도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목적]

김제군에서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던 독립만세 운동에 함께 하여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어났다.

[발단]

수류면 구월리의 청년 배세동이 4월 13일 전주읍장에 갔다가 만세 운동의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뒤 16일 같은 마을의 전도명(田道明), 전도근(田道根), 전부명(田富明), 이병섭(李秉燮), 김성수(金成受) 등과 함께 의논하여 20일 원평장날을 기하여 만세 시위를 펼칠 것을 결정하였다. 배세동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제작 등을 준비했고, 이병섭 등은 각지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경과]

3월 20일 오후 당시 김제군의 동남쪽 원평리 원평장터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전도근과 전부명 등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배세동은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만세 운동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자 김대희(金大熙) 등 수백 명이 시장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결과]

독립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군중이 모이는 곳을 감시하던 경찰에게 원평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고, 배세동 등 주동자 10여 명이 체포·구금되었다. 시위의 핵심 인물인 배세동 등 10여 명은 재판에 회부되어 6개월에서 1년간의 실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의의와 평가]

원평장터 독립만세사건은 김제 주민들의 일제 압제에 대한 저항과 조국 독립의 의지를 내외에 널리 알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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