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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870
한자 崔輔烈
영어음역 Choe Boyeol
이칭/별칭 국명(國明),운정(篔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채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학자
출신지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성별
생년 1847년연표보기
몰년 1922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유학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국명(國明), 호는 운정(篔亭)이다. 고려 충숙왕조에 평장사를 지낸 문성공(文成公) 완산군(完山君) 최아(崔阿)가 비조(鼻祖)이다. 고려조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특진함경감사겸병마수군절도사(特進咸鏡監司兼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 함흥부윤(咸興府尹) 등을 지낸 최진손(崔震孫)이 그 현조(顯祖)이다. 아버지는 문성공 최아의 21세손 최성하(崔聖河)이다. 최보열(崔輔烈)은 1847년 김제시 만경읍에서 태어났으며, 1922년 77세를 일기로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에 있다.

[활동사항]

최보열은 유학자로서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의 도내장의(道內掌議)와 만경현(萬頃縣)의 도헌(都憲)을 지냈다. 사서삼경과 성리학, 예학, 산학, 의학, 시문학 등에 통달하였는데, 특히 예학과 시문학, 고문에 능하였다. 시는 당대(唐代)의 중기와 말기 작풍(作風)을 근본으로 삼았고, 문장은 북송(北宋)의 육일거사(六一居士)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도학이 남긴 공리(功利)와 형식, 사대 봉건적이면서 시국을 알지 못하는 폐쇄주의적 폐습을 지양하고, 실용적이면서 진취적인 실사구시 학문을 전개하였다.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은 최보열을 가리켜 “그 고상한 마음씨, 뛰어난 생각이 아담하고 굳세고 위엄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호산(壺山) 송영대(宋榮大)는 “육경(六經)에 의하여서도 가히 비판할 수 없고 터득할 수도 없으며 시문에 처음 들어가는 문과 길이 올바르다.”라고 평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운정유고(篔亭遺稿)』가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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