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1236
한자 文化柳氏旌閭
영어의미역 Jeongnyeo of Virtuous Woman of Munhwa Yu Clan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낙성리 776-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진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려
양식 팔작지붕
건립시기/일시 1649년(인조 27)연표보기
정면칸수 1칸
측면칸수 1칸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낙성리 776-1 지도보기
문화재 지정번호 지정되지 않음
문화재 지정일 지정되지 않음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낙성리 하사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절부 문화유씨의 정려.

[개설]

열녀 문화유씨는 열아홉 살에 선비 송호와 결혼하였는데, 불행히도 그 해 6월에 남편이 죽었다. 해묵이도 끝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해묵이란 신부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거기서 해를 넘긴 후 시댁으로 돌아오는 풍속이다. 사실 문화유씨는 복중에 아기도 없던 상태였다. 유씨 부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80여 일을 슬피 울다가 마침내 남편의 묘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를 보고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자 나라에서 정문을 세웠다.

[위치]

김제시 금구면 낙성리 776-1번지 하사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1649년(인조 27) 금구현감의 상소로 정려를 받아 정려각을 지었다.

[형태]

문화유씨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고, 정려각 중간에 비석이 있다. 정려 편액은 없고 정려의 내용이 적혀져 있는 정려기 편액이 있다.

[현황]

비문에는 ‘절부학생송처문화유씨지려(節婦學生宋妻文化柳氏之閭)’라고 쓰여 있다. 지금의 정려각 옆에는 여산송씨 소윤공파의 선조 도승지공이 내려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며, 그 후손들이 지금도 이 터전에서 살고 있다. 정려각 주변으로는 철제로 된 경계망이 있고, 후손인 송기방이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절부 문화유씨는 남편이 갑자기 운명하자 거리낌없이 목숨을 끊어버렸다. 열녀는 통상적으로 목숨을 끊지 않고 수절하는 것을 말하지만, 절부는 남편을 따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목숨을 끊는 것을 말한다. 이에 마을에서는 정려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