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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A010102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예은

광활간척지 조성 사업은 1925년 일본 재벌 아베 후사지로[阿部房次郎]가 자기 자본 백만 엔과 일본 정부 자본 백만 엔으로 김제에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공사를 위해 일본 정부는 당시 참모본부에 있던 육군 대좌 후쿠이를 책임자로 불러들였다.

단기간에 많은 인력이 필요한 공사였기에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중국인들도 1천 명에 가까이 동원되었고, 일본에서도 여러 회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덕분에 제방 공사 근처인 남포 포구에는 상고배가 30여 척이나 드나들게 되었다. 각국에서 몰려든 인부들은 마치 전쟁을 하듯 조수와 싸우며 공사를 진행하였다.

방조제 공사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둑을 막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배수 조절이 순조로워야 한다. 그래서 방조제 첫 공사는 바다를 막는 제방보다 먼저 수문을 내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수문을 완성하기 위해, 수문 자리 앞에 흙을 쟁여 임시로 조수를 막으며 1925년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소설 『갯들』로 살아난 광활간척지의 역사]

광활면의 20개 마을 중 하나인 화양마을에는 수문을 막으며 공사를 했을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자손이 아직도 많이 살아 있다.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임영춘의 『갯들』에 나오는 장면을 소개해 본다.

“방조제 공사는 양쪽 끝에서부터 둑을 쌓기 시작해서 가운데에서 합친다. 인부들은 흙을 제방에다 짊어 나른다. 둑 석축을 위해서는 돌도 가져와야 했다. 돌을 실어오기 위해 배나 도록고를 이용했지만, 작업장까지는 오려면 역시 사람의 등을 빌려야 한다. 인부들이 날라 온 돌을 가지고 석축 기술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먼저 흙과 돌을 퍼부어 놓고, 군산형무소에서 죄수들이 엮은 멍석과 각 지방 농장 소작인이 엮은 덕석을 위에 덮고 말뚝을 박으며 계속 메꾸는 것이다. 방조제를 메꾸다가 중간이 패이면, 장대를 꽂아 깊이 팬 자리를 확인하고 그곳에 배를 여러 척 만들어 가라앉힌다. 그 위에 돌과 흙 바구니, 소나무, 돌을 쟁인 가마니를 쌓아서 철사로 묶는다. 방파를 위해 석축 위에다 멍석을 쌓고 또 그 멍석에 소나무로 말뚝을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 안에 또 돌과 흙을 마구 부어 넣는다.

사람들의 작업에 쌓여진 흙 부대나 석축들은 바닷물로 인해 매번 원점으로 돌아갔다. 밀물이 많은 칠월 백중과 시월 보름, 정월 보름사리 때가 가장 위험했다. 총책임자 후쿠이는 계속되는 물살에 의한 실패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시간 싸움을 생각했다. 빠른 시일 내에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해치우는 것이다. 후쿠이는 돈을 아끼지 않고 공사장에 마구 뿌렸다.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사 진척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를 했고, 돈을 보고 전국에서 수많은 인부들이 몰려들었다. 흙짐을 지고 오거나 돌덩이를 메고 오면 유례가 없는 최고의 인건비로 후하게 전표를 끊어 줬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는 인부를 모아 놓고 심지 뽑기를 하여 순차별로 돈을 주고 후대하며 공사에 열을 올렸다. 그러자 인부들이 수도 없이 들어붙었고 밤에도 가스 불을 켜 놓고 철야 작업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계속 되풀이되는 숱한 수난 속에서도 터지면 다시 쌓고 또 터지면 다시 쌓으며 세월을 함께 쌓다 보니, 서서히 방조제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27년, 방조제가 완성되었다. 마침내 길고 긴 파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10㎞의 흰 둑을 만들어 낸 것이다.”

광활방조제는 1925년 제반 준비를 마치고 1927년에 완성되었다. 방조제는 총 5,277칸으로, 두 곳에 배수갑문을 설치하였다. 간척 면적은 총 1,898정보이고 개답 면적은 1,430정보로, 완공된 땅의 위치는 지금도 그 형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정보제공]

  • •  조연식(남, 1927년생, 옥포리 화양마을 주민, 전 광활면장 역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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