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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A010104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예은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에는 일본이 산미증산계획의 일환으로 간척지를 막고 건설한 농장이 있다.

1926년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형성된 땅은 간척 사업의 책임자 이름을 따 ‘아베농장’으로 불렸다.

[팔도에서 몰려든 사람들]

1924년은 유래 없는 큰 흉년을 만난 때였다.

전국적으로 흉작이 발생한데다 식민지하의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착취당하는 일이 많았다. 전국적으로 계속되는 일본의 압박과 착취 속에 기아가 심해지자 생명의 위협에 처한 백성들이 유민으로 떠돌면서 사회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즈음 아베농장에서는 농지를 개간하고 살림살이를 꾸려 나갈 소작농들을 모집하기 위해 이민자 모집 광고를 냈다.

이민자들은 입주에 앞서 이민 심사를 거쳐야 했다. 이민 심사는 가장의 신체 조건과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민 심사에서 최고 점수를 받으려면 몸집이 좋고, 농사일도 잘해야 했다. 농사일에 경험이 많고 잘한다는 기준으로 손바닥에 공이가 굳게 박혀 있는가를 확인했다. 몸집이 작고 비실하게 생긴 사람, 손바닥이 여리한 사람은 여지없이 퇴짜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몸집이 좋고 힘이 센 것만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뽑지는 않았다. 힘이 좋아 뿔이 센 황소 같은 사람은 말을 듣지 않으니 오히려 순한 암소 같은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민 심사를 통과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가구당 방, 부엌, 헛청 각 한 칸이 딸려 있는 3칸 집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다섯 필지의 논을 줬다. 고향을 버리고 새로운 땅에서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굶주림에 허덕이던 사람들에게 집과 땅은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이 때문에 이민자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날 때마다 경상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할 것 없이 전국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군대보다 엄격했던 마을 운영]

광활면은 간척지의 한가운데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길이 나 있다.

이민촌은 이 신작로를 기준으로 남북을 갈라 북쪽이 1답구, 바다로 가까운 남쪽이 2답구 등 해서 9답구까지 되어 있다. 30가구마다 한 답구가 구성되며, 3개의 공동 우물, 5개의 공동 작업소가 있고, 답구를 통솔하는 감독관인 답구장이 있었다. 아홉 개의 답구는 세 개의 농구로 포괄되며, 세 개의 답구를 책임지는 농구의 주임이 있고, 그 위에 총 책임자가 있는 구조로 마을이 운영되었다.

화양마을을 포함해 광활의 이민 사업은 1929년에 시작되었다.

이민심사를 통해 합격된 자들이 순차적으로 들어선 것이다. 1933년에 들어서서 전 지역의 개답[논을 새로 만듦]이 끝나고, 1935년 소작인 676세대의 이민 사업이 마무리되었다.

2009년 현재 화양마을에는 아직도 이민 2세대와 3세대들이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열 살 미만의 나이로 1세대들의 손을 잡고 들어와 보고 겪었던 부모님들의 고생과 노력, 끈기를 가슴에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보제공]

  • •  조연식(남, 1927년생, 옥포리 화양마을 주민, 전 광활면장)
  • •  정치복(남, 1930년생, 옥포리 화양마을 주민)
  • •  이순구(남, 1931년생, 옥포리 화양마을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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