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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A010201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 화양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문예은

[철저한 수탈로 노예처럼 살다]

일제강점기 화양마을이 자리한 광활면은 일본의 산미증산계획에 의해 간척된 땅으로,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이민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민자들은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 3칸 집과 다섯 필지에 대한 경작권을 제공받았다.

하지만 동진농업주식회사와의 계약에 따라 소출의 절반은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 가져갔다. 나머지도 각종 소작료, 비료 대금, 관개용수 사용료, 종자 대금, 연차로 갚아 나가야 입주 가옥 대, 식량 빚 등의 ‘세’라는 명목으로 회사에서 가져갔다. 결국 이민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어라고 더 많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는 이러한 이민자들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동 경작과 공동 타작으로 이민자들이 자신의 논에서 난 벼 이삭 하나 손 댈 수 없게 감시하였다. 그들의 삶은 철저한 수탈로 피폐했는데, 한마디로 노예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일본의 태도 역시 정부의 많은 보조를 받아서 막은 간척지이니 국가의 식량 대책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농부들을 노예화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조연식[1937년생]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일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때 한 가구에 다섯 필지를 받았대. 근데 광활이 간땅이야. 간척해서 막은 땅이란 말이야. 그래서 염기 때문에 수확량이 얼마 없었어. 손이 엄청 많이 갔어. 매번 나락이 타들어가서 많이 해먹어야 한 열 섬? 그것도 우리가 다 먹은 것도 아니야. 수확한 것의 반을 뚝 띠어서 일본으로 가져가. 근데 남은 반도 온전히 내 몫이 되는 게 아니야. 뭐 비료 값이니, 농자재 값이니, 돈도 빌려 쓰고 한 거 있으면 그것도 갚아야 하지. 그래서 남는 게 없었어. 식량도 없어서 밥을 굶고 겨우 연명해 나가는 수준이었지.”

소금기가 가시지 않은 땅에서 농작물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논에서보다 몇 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한 집에서는 무조건 2인 이상이 일을 해야 해서, 부모가 아프면 아이라도 대신해서 일을 했다. 염기를 빼기 위해 논두렁의 용수와 배수 출입을 반복해야 했으며, 논의 해충을 잡기 위해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목표량을 지정해 주기도 했다.

탐스럽게 자란 벼 이삭을 눈앞에 놓고도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소작인들은 주린 배를 잡고 논두렁에 들어가 나무그늘도 없는 햇볕 속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쌀알을 빼돌려 먹고 살았어]

조용환[1935년생] 할아버지 역시 배고픈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면서 당시의 일을 기억해냈다.

“홀태질을 하면 일본 놈들이 감독을 혀. 아주 철저하게. 그때 여자들은 홀태질로 벼 이삭을 훑고, 남자들은 볏단을 묶어서 날라 줬거든. 그럼 여자들이 조금씩 쌀알을 빼돌리는 거야. 홀태로 훑을 때 전부 훑는 게 아니야. 조금 냄겨 놔. 볏단에. 그러고 버리는 데로 버려 버려. 그럼 그 쌀알들이 볏단에 붙어 있는 놈이 좀 있을 거 아니야? 나중에 일본 놈들이 다 물러가고 자리 정리하느라 우리만 남으면, 그때 손으로 하나하나 훑는 거야. 그래서 그걸로 우리 밥을 해주셨어.

그렇게도 하고, 당시는 쌀을 가마니로 담아냈잖아. 홀태질을 할 때 조금씩 쌀을 훑어 모아. 그래서 그놈을 가마니에 담아. 그럼 마당 한쪽에 퇴비로 사용하려고 쌓아둔 볏단이 있거든? 점심시간 같은 때, 감독관의 시선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짚 볏단 사이에 찡겨 놓았어. 그러면 일본 사람들이 눈치를 못 채더라고. 그래서 나중에 작업 끝나고 자리 파하면, 그 가마니를 몰래 빼서 갖다 먹었지. 그렇게 쌀 맛을 봤어.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나를 먹였어. 근데 그게 쌀을 빼돌리는 게 아니야. 우리가 보면 정말 생존 경쟁이었어.”

[쌀알이 몇 개 달렸는지 세었다니까]

광활권역 농촌사무장으로 일하는 한 모[1956년생] 씨는 어린 시절부터 노상 들었던 얘기라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주었다.

“옛날에 모내기를 해서 벼가 익으면 벼 포기를 세서 한 주에 몇 개인가, 그 한 포기에 쌀알이 몇 톨이나 영글었는가에 대해서도 전부 세요. 하나하나. 그거 전부 계산해 보면 논에서 나올 쌀의 산출량이 나오죠. 그렇게 철저하게 쌀 수확량을 감독했대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끼리 도와 쌀을 조금씩 얻어내는 수단을 만들었대요. 감독들이 각 마을을 돌면서 나락을 검사하잖아요? 그때 시선이 나락으로 집중되는 틈을 노리는 거죠. 검사받기 바로 전의 논에 쌀알을 좀 추려서 땅을 파고 묻어 둬요. 내가 먹을 쌀을 내가 묻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검사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이 묻어 주는 식으로. 그렇게 서로 도우며 식량을 비축했대요. 묻은 쌀은 밤에 몰래 파서 절구통에 찧어 식량으로 먹곤 했죠.”

그렇게 소작인들은 염기가 벤 땅에서 열심히 일하여 얻어 낸, 고생과 땀의 결실을 누릴 수 없었다. 감독관의 시선을 피해 사람들끼리 협심하여 식량을 조금씩 얻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또한 방조제 관리와 염기 제거를 비롯한 각종 노동에 강제로 동원되었고, 이러한 공동 노동에 참가하지 않았을 때는 마을에서 추방을 당했다.

화양1구에 살고 있는 이주민 2세대, 3세대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부모님이 겪어야 했던 고생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온 주민들은 대한민국의 해방은, 바로 이 광활면의 해방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정보제공]

  • •  조연식(남, 1927년생, 옥포리 화양마을 주민, 전 광활면장)
  • •  조용환(남, 1935년생, 옥포리 화양1구 이장 겸 노인회장)
  • •  한모(남, 1956년생, 광활권역 농촌사무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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